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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1-05 00:00
[인물포커스] '가야산 대쪽'이라 불리우던 대한불교조계종 혜암종정
 글쓴이 : 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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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 출가 이래 50여년을 장좌불와(長座不臥) 하며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참선수행에 앞장서 온, 한국의 대표적 선승(禪僧) 대한불교 조계종 혜암 종정. 신사년 마직막날인 지난달 31일 세수 82세 법랍 55세에 원적에 올라 많은 사부대중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원칙과 소신이 뚜렷해 ‘가야산 대쪽’이라 불리우기도 했던 스님은 1994년 조계종 개혁 불교 탄생과 1998년 조계종 종단사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99년 조계종 제 10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조계종단의 정신적 지도자로 평가받아 왔다. 스님은 1946(27세)년 출가한 이래 불교개혁의 선봉장으로, 수행의 모범자로 추앙받아왔다. 특히 성철, 우봉, 자운, 보문, 도우, 보면, 일도 등 20여명의 스님들과 주축이 되어 시작된 봉암사 결사는 오늘날 조계종풍의 밑걸음이 됐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 라는 뜻을 구현 하고자 일일불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하며 대중들에게 지게를 하나씩 지급하여 날마다 운력(運力)을 하도록 하고 午後不食을 지키도록 했다. 대중을 보호하느라 각처에서 탁발해온 공양물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짐을 져 올렸는데, 모진 폭풍우가 내리는 날에도 한결 같았다. 종교개혁에 가까운 이러한 수행법이 오늘날 불교의 각종예식과 전범에 녹아 이어지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 수선안거(首先安居)이래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인 한암, 효봉 선사 등을 모시고 45 하안거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한 혜암종정의 고행정진은 대중들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혜암종정이 대선사인 인곡스님의 상좌로 들어가게 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곡선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혜암종정은 ‘아-악’으로 일갈했다. ‘네 고향이 어디냐’ 는 물음에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내리치고 ‘네 이름이 어디냐’에 답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이어 인곡선사는 “우리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 이 이치를 알겠느냐?” 물었다. 그러자 혜암종정은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에 인곡선사는 빙그레 웃으시며 혜암종정을 상좌로 받아 들였다. 효봉스님에게 갓 수계를 받고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수계받자마자 퇴설당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 하자 갓 계 받은 사미라 하여 대중들이 반대를 했다. 효봉 조실스님은 “공부하는데 구참, 신참이 어디있느냐. 성관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자 대중들이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혜암종정의 뛰어난 선지(禪指)가 알려지면서 수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93년 해인총림 제6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500여 총림을 지도했다. 또한 96년에는 달마서원을 신축해 매 안거때마다 100여 안거대중과 월 500여 철야법회 대중에게 참선을 직접 지도하므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철저한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수행 정진한 이 시대 최고의 禪僧 혜암종정.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했던 불교 개혁적인 종정스님의 삶은 한국 불교사에 커다란 가르침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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