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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2-08 19:09
[불교어록방] 법천대종사 법어 <삼동결제와 백일기도>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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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동결제와 백일기도>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하되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영(昭昭靈靈)하야 부증생부증멸(不增生不增滅)이며 명부득상부득(名不得相不得)이로다.

 

이 말씀은 서산대사가 지으신 선가귀감이라는 책의 첫구절입니다. 오늘은 겨울안거를 시작하는 결제일이고 또 우리절에서는 이기간 동안에 백일기도를 올리는데 오늘은 그 입재를 하는 날이므로 결제를 하는 마음, 기도를 하는 마음 - 이 마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서산대사는 불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임진왜란때 왜병의 무력 앞에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스님들로 구성된 승병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친 스님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지요.

그러나 서산스님은 단지 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물리친 무장으로서만이 아니라 불교의 교리와 선에 통달하시고 선과 교를 하나로 회통시킨 훌륭한 도인이십니다. 선가귀감은 서산스님께서 불교의 진리를 간결한 문장으로 요햑한 책인데 그 첫머리에 앞에 든 글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도 모양도 알 수가 없다." 하는 뜻입니다.

 

서산스님은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란 서산스님의 곁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곁,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우리자신 가운데도 되고 이 세상 어느 곳이건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이건 간에 이 한 물건이 있는데 도대체 이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 하는 것입니다.

 

이 한 물건은 본래부터 있었으므로 새로 태어난 것도 아니요, 태어난 일이 없으므로 죽는 것도 아니며, 무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그 모양을 알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 과연 이 물건이 무엇이냐?

 

이것을 깨달아버리면 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이른다 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건이라고 한 것도 부득이 물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한 물건이란 어떤 물질이 아니라 <한 무엇>이라고 하는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한 무엇>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는 것도 아니며 무엇이라고 이름지어서 말할 수도 없고 그 형상을 그려낼 수도 없는 것이다 - 그러면 여러분은 이 한 물건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이야? 부처님이냐? 귀신이냐?

무엇일까요?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나시기 전부터 있었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 달리말하면 진여자성이니 여래니 부처님이니 불성이니 도라거니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꼭 들어맞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동그라미로써 표시한 것입니다.

 

중국의 혜충이라는 스님은 이 일원상의 심오한 뜻을 아흔 일곱가지의 그림으로 나타내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가지로 설명한다고 해도 이 일원상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원은 시작도 끝도 없고, 작게 그리면 티끌 속에도 들어가지만 크게는 이 온 우주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도 있습니다.

 

법성게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이 있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글이 뜻하는 법성(法性)은 바로 법의 성품, 진리의 근본을 말하는 것으로 선가귀감에서 서산대사가 말씀하신 <한 물건>과 같은 것입니다. 이 법성인 한 물건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는 일원상보다 더한 상징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하고서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바로 이 한 물건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한 물건>은 옛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전에도 뚜렷이 밝았도다 - 한 것은 이 한 물건, 일원상으로 나타낸 진리자체는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식이 전에도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들은 진리나 어떤 법칙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하신 분이지 진리를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 뿐 누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존재하는 진리의 실상을 발견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므로 부처님이 나시기 전에도 이미 이 <한 물건>은 존재한 것입니다.

 

다시 선가귀감을 보면,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 손가하니 이것은 한 물건이 아는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니라.

 

회양선사가 숭산에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시고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까닭이다."

 

이상은 선가귀감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고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습니다. 이 동그라미는 일원상이라고 하는 것인데 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느냐? 하면 여기서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도 나타낼 수가 없으니까 원을 그려서 이를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이 일원상은 원불교에서는 불상 대신에 법신불로 모시고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원에는 여러가지의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물건>이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진리란 모양도 이름도 없기 때문에 이를 동그라미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삼조(三祖 = 선종의 삼대조사)이신 승찬대사는 신심명이라는 글에서 "원동태허(圓同太虛)하여, 무결무여(無缺無如)"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허공처럼 뚜렷하여 무자람도 남는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는 구절은 우리 불자들로 하여금 무슨 말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도를 깨닫지 못했다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고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제자들 가운데서도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이어받았는데 아난존자는 팔만대장경으로 전해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통한 가르침 즉 교()를 이어받았고 가섭존자는 말로써는 못다한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진리 즉 마음을 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는데 마음과 마음으로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도 모르셨다면 어떻게 가섭존자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가섭존자는 어떻게 뒷 사람에게 전할 수 있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도 않고 얻거나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가귀감이라는 책이 선도리를 이야기한 선법문이므로 글자의 뜻보다는 그 뒤에 숨은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구절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육조스님과 신회스님, 회양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육조스님은 중국에 있어서 선종의 6대조사가 되는 분입니다. 중국에서는 보리달마스님을 초대조사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째 되는 분인 혜능스님을 육조라고 하는데 본래 이 스님은 나무꾼이었습니다. 세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해서 공부도 못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팔아 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스물네살 되든 해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 속으로 크게 깨달은 바 있어서 금강경을 읽던 그 사람의 권유로 출가를 하여 오조 홍인대사를 찾아가 한동안 방아찧는 행자그러다가 홍인대사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중국 선종의 육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스님이 하루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셨는데,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이렇게 물으시자 대중가운데서 신회라는 분이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회스님의 대답은 육조스님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지 못해서 적자(嫡子)가 되지 못하고 서자(庶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적자가 되지 못했을까요?

 

이름도 없고 자도 없는 한 물건을 아느냐?하고 물으셨는데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자기의 불성>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말했지 않습니까? 신회스님이 이름지어<이것이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육조스님이 굳이 이름 지을 수도 없다고 하셨을 리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일찌기 우리 중생들의 성품을 관찰하시고,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불성이 여기서 말하는 한 물건인 것은 사실이나 부처님께서 불성이라고 한 것도 부득이 설명을 하자니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 불성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서 꼭 맞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불성을 달리 말하면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여러분도 다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찾으면 어디서 찾아집니까? 마음이 다 있다고 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 있으며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람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 이런 한량없는 마음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모양을 알 수 없고, 있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있다면 <이것이다>고 내보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리 찾아도 드러내 보일 수도 없는 것이 마음 아닙니까?

 

있다면 <이것이다>고 내보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리 찾아도 드러내 보일 수도 없는 것이 마음 아닙니까?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바로 이와같은 것이 마음이요, 불성인데 마음이라는 것도 이름이 마음일 뿐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중국사람들은 마음을 심()이라고 하는데 미국사람들은 마인드(mind)라고 하는 일본사람들은 고코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마다 사람의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까?

 

이처럼 잡을 수도 없고 이름지을 수도 없는 것을 부득이 마음이다, 불성이다,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니 불성이니 하는 말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회스님이 딱부러지게 <불성이다>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회양이라는 스님은 처음 육조스님을 찾아뵙자 육조스님께서 대뜸<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시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8년간이나 그 대답을 찾아서 공부를 한 후 마침내 그 <한 물건>의 정체를 깨닫고는 육조스님께 말하기를,“설사 한 물건이라고 한다해도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 부득이해서 <한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표현도 자기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꼭 맞는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육조의 적자가 되었다는 말은 육조스님께서 회양스님의 깨달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불자 여러분!

 

오늘은 삼동결제를 시작하는 결제일이므로 좀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사실 불성이니 진여니 한 물건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은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처음 건너와서 무제라는 임금과 대화하는 가운데 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묻기를 <당신은 누구요?>하자 달마스님은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른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안다 모른다하는 모름이 아니라 바로 진리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모르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이런 까다로운 말은 그만 하고 좀 더 쉽고 우리 생활과 직접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여러분은 무엇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명예? 남편? 자식? 그렇습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조건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는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시적인 것, 즉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결제를 하는 것이고 이 마음을 잘 쓸 수 있게 해주십사하고 불보살님께 백일간 정성껏 기도를 모시려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목적, 힘들여 일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행복해지는 것 아닙니까? 도를 깨닫자, 부처가 되자, 해탈을 하자, 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자는 말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얻어내려면 마음을 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가히 얻을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있다 없다 할 수도 없는 요상한 것이어서 자기자신도 자기마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으려해도 고민이 되고 의심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의심이 되는 것을 어찌하느냐 이겁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도를 하는 것이고,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마음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정체는 부처님도 스님도 남편도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기마음을 자기도 모르느냐?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마음대로 못쓰는 것 아닙니까? 운전기술도 없으면서 차를 몰고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를 내지요. 바로 마음을 운전할 줄 모르고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근심 걱정을 도맡아 하면서 불행하다!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마음 자기도 모르는 이유는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는 데 따라 마음이 정신없이 치닫기 때문에 본모습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에서는 바다의 본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을 깨닫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선 마음을 쉬어야 합니다. 안정시켜야 합니다. 보고 듣고 맛보는 데로 마음을 이리 저리 굴리지 말고 한 곳에 가만히 있게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마음이 마치 잔잔한 바다처럼 되어서 그 모습을 알 수 있고 나중에는 자기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삼동결제와 더불어 부처님전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마음이 앞으로 석달 열흘동안 변치않고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십시오.

 

바로 부처님께 묶어 두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에게 묶어두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침내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한 물건>만이 오롯이 남아서 그것을 찾아내면 그때는 그 마음을 여러분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오늘을 계기로 우리의 마음을 부처님 곁에 꼭 묶어 둠으로써 모든 괴로움을 해결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득합시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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