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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26 23:16
[불교어록방] <법천대종사 법어> 진정한 출가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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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출가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하니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鷰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로다

나무아미타불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내집인 줄 깨달았네

6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르다.

 

이 게송은 근세 한국불교계에서 선풍을 크게 진직시킨 경허스님의 오도송입니다.

오도송(悟道訟)이란 깨달은 경지를 읊은 시를 말합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입니다.

왕궁의 영화를 버리시고 알몸뚱이로 저 막막한 들녘을 향하여 결연히 뒤쳐나가신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분의 출가를 기리고 그 출가정신을 본받자고 여기 이 법회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경허스님의 오도송을 인용했는지 그 까닭을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벌써 돈각삼천...하기 전에 내 속을 들여다 보았다면 인천의 대도사요, 게송을 다 듣고 가까스로 알아차렸다면 아직 생사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요, 아직도 캄캄하다면 갈 길이 까마득한 사람입니다. 바쁘고 바쁜길입니다. 무상살귀가 잠시도 쉬지 않고 쫓아 오고 있는데, 백년하세월 꾸벅꾸벅 졸고만 있다가 마지막 숨 끊어지는 자리에서 어찌하렵니까?

 

그때서야 발을 동동 굴러본아야 배 떠난 항구요, 사또행차 지나간 뒤 나팔부는 짓이요, 잎 진 후 단풍놀이 가는 격입니다.

 

경허스님이 오도송에서 밝혔듯이 눈을 크게 드면 이 세상이 모두 내 집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경허스님의 혼자만의 집이 아니라 저의 집이요, 또한 여러분의 집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2600년 전 오늘 왕궁을 버리고 떠나신 싯달타의 집이기도 합니다.

 

뛰어보았자 벼룩입니다. 우주선이 아무이 멀리 날아가도 우주공간에 있듯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내 집인데 출가라니 어디로 나간단 말입니까? 손오공이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아무리 집을 뛰쳐나가 보아야 삼계요, 삼계는 곧 내 집이니 어떻게 출가한단 말입니까?

 

나갈 집은 어디에 있고, 집을 나가 갈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집을 떠나는 것을 출가라고 생각한다면, 26백년 전에 왕궁을 버리고 집을 떠난

싯달타는 미끼없는 곧은 낚시로 붕어를 낚고자 했던 사람이요,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그 날을 기념하는 여러분은 빈 낚시꾼 옆에서 안주감을 기다리며 술병을 만지작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싯달타가 빈낚시꾼을 면하고 여러분은 어리석은 사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 문제를 낼테니 대답해 보십시오. 대답할 수 있으면 싯달태자가 출가가 되고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도 덩달아 진출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조물주라는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주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사람을 비롯하여 온갖 생명과 물질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전에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주를 만들기 전에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오늘 싯달태자가 출가한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 땅 생기기 전, 삼천대천세계가 생기기 전에 있던 한 물건, 그것이 하느님이건 여호와건 알라건 브라흐만이건 천재님이건 부처님이라고 상관없습니다. 그 한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만 안다면 경허스님처럼 이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내 집인줄을 알 수 있고, 그 집을 뛰쳐나가 진짜 출가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는 달을 보지 못합니다. 손가락은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싯달태자가 집을 나선 출가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그러면 어떤 것이 달입니까?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경허스님의 오도송을 인용했는지 그 까닭을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천강유수천강월(天江有水千江月) 이요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 이로다.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달이 뜨고

만리장천에 구름 한 점 없으면 만리가 그대로 한 하늘이네.

 

출가절 법문은 여기서 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는 분이 없는 것을 보면 내 설법이 구두선(口頭禪)에 머물고 말았다는 생각이 듬으로 몇마디 사족(蛇足)을 붙여볼까 합니다.

 

싯달태자는 26백년 전 오늘 사랑하는 처자와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집을 떠나는 출가를 했지만 이 출가는 겉모습의 형식적인 출가요, 진짜 출가는 6년 후에 보리수 아래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싯달타는 비록 왕자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아름다운 야쇼다라공주와 결혼하여 라후라라는 아들까지 낳았고, 왕자로서 온갖 쾌락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한시도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 항상하는 것이 아니었고 생사에 대한 번뇌는 떠날 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재산.명예. 가정.건강 이런것들을 찾아서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경주하지 않습니까? 그것들만 갖추면 행복은 호박이 넝쿨채롤 굴러들어오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칸 착각입니다. 왜냐? 그 모든 것들은 싯달태자가 26백년 전에 이미 소유했었지만 거기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것들을 버리고 집을 떠났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재산과 지위와 가정을 버리는 것만으로 행복이 달성되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설산에서 수도하셨던 6년이란 세월은 왕궁의 생활보다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도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행하자고 괴롭자고 수도한 것입니까? 고통을 참고 살기 위해 수도하는 것입니까?

 

수도하는 목적은 보다 더 자유로운 생활, 보다 더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한 방법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일 싯달타 태자가 그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집을 나가서 산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수도를 했다 할지라도 만일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부처님이 되시지 못했다면 싯달타의 고행은 한낮 무의미한 고행에 지나지 않는것이요, 집을 나간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겨준 불효자식, 무정한 남편, 무책임한 아버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싯달타의 출가가 현실의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탈피하자는 것이라면 무작정 가출하는 소년소녀들의 가출과 무슨 다른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싯달태자가 집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출가절이라고 기념할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싯달태자는 마침내 부처가 되셨고, 진정한 의미의 출가에 성공하셨습니다.

 

단순히 왕궁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신 것이 아니라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를 뛰어넘는 큰 출가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단지 집을 나선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망상을 여의고 본래부터 간직된 불성을 해방시켜 참다운 자신을 무명의 집으로부터 밖으로 끌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우리가 출가절이라고해서 기념하는 진정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싯달태자가 왕궁을 나선 것을 형식상의 출가한 한다면 성도하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출가, 곧 진짜 출가가 되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의 구한말의 유명한 선지식입니다.

경허스님은 일찍 출가하여 큰 절에서 강사스님으로 활약을 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는 박학다식했지만 생사의 근본을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스님 자신이 그런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콜레라가 창궐한 마을을 지나다가 문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때까지의 공부가 단지 이론에 불과하고 자신의 생사문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단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길로 절로 되돌아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참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옆방에서 사람들이 두고 받는 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의심이 풀리고 자기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심정을 읊은 것이 바로 맨 처음 인용한 게송입니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하니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鷰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로다.

 

<홀문인어무비공>이란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인데, 마침 경허스님의 옆방에서 누군가가 <죽어서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라>는 말을 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콧구멍 없는 소 여러분은 그런 소를 보셨습니까?

 

이 콧구멍 없는 소를 찾기만 하면 여러분도 돈각삼천시아가를 노래할 자격이 있고, 생사없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콧구멍 없는 소는 바로 여러분의 본래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돈각삼천시아가>< 삼천대천세계가 이 내집임을 몰록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돈각>은 우리말로 몰록 깨닫다는 뜻입니다만 몰록이란 말은 우리말이면서도 잘쓰지 않는 말이라서 생소하게 느끼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차근차근 생각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또는 문득 깨달았다 고 하는 뜻입니다.

 

<삼천시아가>< 이 우주가 바로 내집>이라는 뜻임으로 <돈각삼천시아가>이 우주전체가 바로 내집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쯤되면 이 세상이 온통 내 집이니 가도 가는 것이 아니요, 와도 오는 것이 아니며 출가와 재가의 구별도 없습니다.불거불래(不去不來) 역무주(亦無住)- 가는것도 아니요 오는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머무르는 것도 아닌 이런 경계에 이른다면 구태여 출가를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본래모습을 깨달을 사람을 출가니 재가(在家)니 하는 구별이 따로 없습니다. 앉은 그대로 출가요,고속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도 안방에 있는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눈이 밝지 못한 사람에게는 출가는 반듯이 한번은 거쳐야 하는 생사의 관문입니다. 병아리가 알 속에 있으면 달걀이지 병아리가 아닙니다.어미닭이 알을 품은 지 스므하루가 되면 달걀은 눈도 코도 다 갖춘 병아리가 됩니다. 그러나 알 속의 병아리는 아직 병아리 구실을 하지 못하는 달걀- 그것도 먹지도 못하는 달걀입니다.

알 속의 병아리가 그 연약한 부리로 껍질을 툭툭, 무수히 쪼아대면서 몸을 비틀면 그때 어미닭은 그 단단한 부리로 밖에서 톡톡 건드려 줍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병아리는 알을 깨뜨리고 넓은 세상으로 고개를 내밀게 됩니다.비로소 한 마리의 병아리로 태어나 닭이 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 森羅萬象 頭頭物物),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대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요,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명명백초두( 明明百草頭)에 명명조사의( 明明祖師意)라 했습니다. 온갖 풀 끝에도 조사의 뜻- 곧 진리가 그대로 들어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간직했다>하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본래부터 풀 끝에 있던 분명한 그 성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나 병아리는 제 아무리 눈과 귀,,혀를 갖추었다고 해도 알속에 있는 한 달걀이지 병아리는 아닙니다. 기를 쓰고 껍질을 깨뜨리는 노력이 없으면 결국 달걀이 되고 맙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성품을 갖춘 부처라고 하지만 그대로 부처라고 생각하면 달걀을 병아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눈과 귀와 코와 부리와 발가락과 털까지 다 갖춘 병아리라도 두꺼운 껍질을 쓰고 있으면 달걀인 것처럼 중생에게 불성이라고 하는 고귀한 성품이 완전하게 갖춰져 있다고 할지라도 번뇌. 망상의 두꺼운 무명의 껍질이 불성을 덮고 있는 한 부처가 아니라 중생입니다. 부처는 부처로되 무명의 껍질속에 갇혀서 몸부림치는 부처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깨달은 이에게는 출가와 재가가 따로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손바닥이므로 나가고 들어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마치 알 속에 갇힌 병아리가 껍질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야만 삐약삐약 소리도 지를수 있고 마음 껏 걸을수도 있는 것처럼 중생들도 무명의 껍질을 뚫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넓은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무명이라는 집을 깨트려 부수고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출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들도 부처님의 뒤를 따라서 출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의 하신 출가를 우리도 결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같이 머리를 깍거나 집을 버리고 수도생활을 하자는 주장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한 마음이요, 중생심을 떠나 따로 불심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간적으로는 버리고 떠날 집도, 떠나가 머무를 곳도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출가는 집을 떠나는 형식적인 출가가 아니라 무명속에 갇혀 어둠속을 방황하는 자기자신의 주인공을 무명의 어두운 집에서 출가시켜야 하고, 번뇌의 화택에서 밖으로 뛰쳐나가게하는 출가라야 합니다.

 

번뇌의 화택에 갇힌 주인공, 천년만년을 거름더미 속에 묻어둔채 그 존재를 잊고 살아 온 참 나를 찾는 작업이 바로 알속의 병아리처럼 제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이요, 자기자신의 번뇌의 껍질을 깨뜨리는 작업, 이것이 진정한 중생들의 출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 자기의 불성을 되찾아서 진정한 출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정진할 것인가?

이 뭣인고?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이 놈이 무엇인고?

작은 집 보다는 큰 집을 좋아하는 이 놈이 무엇인고?

무엇인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한 생각을 자나깨나 잊지 않고, 속상할 때도 이뭐꼬?” 기뻐서 눈물이 날 때도 이뭐꼬?”-마치 달걀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렇게 오직 한마음으로 의심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의심이 오직 일념이 되었을 때,마치 어미닭이 밖에서 껍질을 깨뜨려주듯, 시절 인연을 만나게 되면 이뭐꼬-하는 주인공, 무명의 집을 뛰쳐나가는 자기자신의 본래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여러분도 경허스님의 오도송에 나오는 연암산 산아래 들사람처럼 태평가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힘써 정진하여 진출가를 합니다.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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