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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30 00:25
[인물포커스] 일붕 서경보대종사 전기<붕새의 꿈과 기적>
 글쓴이 : SBC불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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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 서경보 대종사 전기

<붕새의 꿈과 기적>

 

1부 출가이전 재가생활

1장 큰스님 태어난 축복받은 땅 제주도

 

< 추사와 초의선사의 일화 >

휘몰아치는 바닷바람, 그리고 눈보라, 바닷바람소리에 실려오는 파도소리, 섬 전체는 죽은 듯 인적이 끊겼다. 그 정적속에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답답한 심사를 달랠길 없어 지필묵을 꺼냈다. 눈발처럼 흰 화선지 위에 잠시 묵향이 흐르고 난 후의 화선지에는 차가운 눈보라 속에 우뚝 선 한그루의 소나무가 독야청청히 서있다. 그 소나무 옆에는 초라한 모습의 집 한 채, 그 집은 어쩌면 자신이 유배당해 머물고 있는 그 집인지도 모른다. 이 한폭의 그림이 추사 김정희로 하여금 추사이게 했던 유명한 문인화 <세한도(歲寒圖)>이다.

 

나라사랑하는 생각과 방법이 집권세력과 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륙만리 떨어진 버려진 땅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당대의 석학이요, 금석학자요, 서예가였던 추사를 찾는 인물은 한국 다도(茶道)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초의선사(草衣禪師)뿐이었다.

 

추사는 유학자로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른 반면 초의선사는 이름 그대로 불교승려였다.

이처럼 신앙을 달리하고 한쪽은 사대부집안으로, 다른 한쪽은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승려였음에도 두 사람의 만남의 인연은 생사를 초월할 정도로 두터운 것이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카페리호가 파도를 가르는 과학문명인 시대인 지금도 큰 마음 먹어야 갈 수 있는 땅 제주도를 초의선사는 보잘 것 없는 목선에 몸을 싣고 엄습하는 파도를 가르며 무려 세 번이나 추사를 찾았던 것입니다. 추사는 귀양살이 하는 몸으로 범인은 함부러 가까이 할 수 없던 죄인이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찬바람이 분다는 세정, 이미 권좌에서 쫒겨나 죄인의 몸이 되어 있는 추사를 초의선사는 세 번이나 찾아가 우정을 나눴던 것이다. 바로 180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제주도, 한때는 이처럼 귀양인이 모질게 생명을 이어가던 땅이다. 섬 한복판에 우뚝 솟은 1950미터의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길이 180, 남북100여리, 섬둘레 600여리의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타원형의 섬이다.

 

< 제주도는 어떤 곳인가 >

애초에는 해상을 떠다니던 유우민(流寓民)으로 이뤄진 섬나라 탐라.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예속되어 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다시 신라에 예속되기도 했다. 그 후 고려,이조를 거치는 동안에 제주도는 추사의 경우처럼 중죄인을 벌하는 유배지가 되었다.

 

제주 본섬을 주축으로 주위의 37개의 도서를 합하여 섬()의 위치에서 해방 후인 1946년에 한반도에서 가장 적은 도()로 승격하여 전라남도에서 분리되게 되었다. 처음에 남제주군과 북제주군,3개읍,10면으로 행정분할되었다가 북제주의 제주읍과 남제주의 서귀포가 시로 승격하여 현재는 2,2,7,5면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 삼다도와 삼무도 >

세한도의 주인공이 어느 하늘의 별로 사라진 반세기 후 , 유채꽃으로 상징되는 제주도에 한 거송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특별히 감춰둘만한 물건을 가진게 없으니 대문이 따로이 필요할 것이 없고,섬 주변의 농토와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어획물로 거지가 따로이 있을 것도 없고, 또 그런 환경에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그릇된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둑이 없고, 대문이 없고, 거지가 없는 섬이라해서 예부터 삼무도(三無島)라 불리웠던 섬, 그런가하면 바람이 없고, 옛 고.신생대에 화산의 분출로 이뤄진 섬이었으므로 섬 전체에 돌과 바위가 많게 되었으며,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삼으며 살아야 했던 생활환경의 여건 때문에 가련한 그곳 여인들은 하늘과 같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남편, 혹은 아들을 바다에 빼앗기고 아픈 삶을 살아가야 했으므로 다른곳에 비교하여 여성의 인구밀도가 높았던 섬, 그래서 별칭 삼다도(三多島)라고도 불리워야 했던 제주땅이다.

 

이처럼 삼무와 삼다라는 전혀 상반되는 개념이 교차되던 제주도가 이제는 대자연의 자연환경 보고로, 국제적인 관광지로 새로이 발돋움하기에 이른 축복받는 땅이 되었다. 머지않아 한반도가 통일되면 제주땅은 국제관광지로 명실공히 그 위치를 굳건히 할 것임이 틀림없을 것 같다.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큰스님은 바로 세한도의 본고장인 이곳 제주도에서 태어나셨다.

제주도 남군 중문면 도순리(현 서귀포시)에서 이천서씨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큰스님 집안이 어떤 경로로 반농.반어촌인 이곳 중문면 도순리에 자리잡게 되었는가 알아보자.

 

그곳 본바닥의 성시가 고().().() 씨라는 속설에 비춰보더라도 지난 시대의 역사의 회오리 속에 그곳에 귀양살이하던 반체제 인사의 후예로, 아니면 시기와 질시와 모략이 난무하는 육지인의 세속적인 세상살이가 싫어서 그곳에 몸을 숨긴 어느 유생의 후예중의 한 경우일 것이다.

 

제 2장 삼장전인의 어머님 태몽

 

<어머님꿈에 옥구슬을 전해 받다>

어느 시인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피울음을 토해내야 했고,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어야 했다고 표현했다이처럼 국화꽃이 아픔과 고통의 상징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서기(瑞氣)와 상서(祥瑞)로움 속에서 피어난 고고한 한송이의 연꽃에 비유할 수 있겠다.

 

20세기 초,5월 어느날남제주군 중문면 도순리한라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도순리는 멀리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해안마을이지만 주민 대다수는 어업보다는 비옥한 농토에서 농사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다따사로운 봄기운이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봄아직 깊은밤에 한 아낙내는 잠결에 눈을 뜨고 기이한 꿈을 생각하며 혹시 태몽이 아닐까하며 혼자 낮을 붉혔다.

 

노란 색깔의 옷차림에 길반이 넘는 긴 지팡이를 짚은 백발 노승이 구름이 자욱하게 쌓인 한라산으로부터 미끄러지듯 날아 내려오더니 푸른 옥구슬을 꺼내어 여인에게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다.

부인이여이 구슬을 받으시오.”

부인은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그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시는 스님이시온데 이런 값진 보배를 저에게 주십니까?”하였더니

나는 한라산 백운사에 있는 중입니다그간 이 푸른 옥구슬을 전할데가 없더니 귀댁에 인연이 있어 전하게 되어 가지고 왔으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이 옥구슬이나 받으시오” 하는 것이었다부인은 당황하여 물었다.

이처럼 진귀한 옥구슬을 아무 까닭도 없이 어찌 거져 받을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전세에 지은 인연에 따라 되는것인데 댓가가 무슨 댓가입니까부인이 받을만한 인연을 전생에서 지셨고나 또한 드릴만하니까 드리는 것이니 여러말씀 마시고 받기나 하십시오.”

부인은 두 손을 모아 노승이 건네주는 옥구슬을 고이 받았다받아 본 옥구슬에는 부인으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스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받았습니다마는 옥구슬에 새겨진 글자는 무슨뜻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 그것은 삼장전인(三藏傳印)이라는 네글자입니다.”

“ 그것은 무슨뜻입니까?”

머잖아 댁에서 아들을 낳으시면 그 아드님이 장차 삼장법사라는 이름을 지닌 큰 인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몇 번인가 입속으로 삼장법사라는 말을 되뇌이던 부인은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스님삼장법사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이 노승이 설명해 드려도 부인께서는 모르실것입니다장차 태어날 아드님이 크시면 저절로 알게 될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말고 그 옥구슬이나 고이 간직하옵소서” 하고 황색옷을 입은 노승은 삽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1459부인은 밀동자 같은 아들을 출산했다.

바로 갑인년 봄이었다갓 태어난 아기는 유난히 살갗이 희었으며 이목이 수려했다.

이천서씨 문중에서는 귀한 옥동자가 태어났다고 웃음꽃이 활짤 피었으며 큰스님의 아버님은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금줄을 꼬고 있었다.

 

3장 일붕 큰스님의 조부님과 부모님

 

<승리자는 역사의 주인공>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는 뜻으로 호모 사피엔스라고도 하지만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으로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부른다정치적 동물성을 지닌 인간이 정치적 동물성은 긍정적일때는 개개인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것이 부정적일때는 때로 비극을 가져온다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도 예외는 아니다.

“ 같은 우유를 마시고도 독사는 독을 뿜어내지만 젖소는 신선한 우유를 공급한다.”는 가르침이다.

식민지시대의 일본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가리켜서 파당성이 강한 민족이며그런 민족성은 우리 한국이 처한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파당성은 헤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했다자신들은 우등민족이라는 속이 들여다뵈는 억지 논리를 펴려는데서 비롯된 발상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제3공화국 이후아세아의 최열등 후진구겡서 세계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을 이룩한 사실만 보더라도또한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 교포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한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결코 열등민족이 아니다.

 

우리의 당파싸움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은 많은데 이를 모두 수용할 만한 자리가 없는데서 빚어진말하자면 운영의 묘를 제대로 찾지 못한데서 비롯된 모순일 것이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꼭 자의적(字義的)인 뜻만 있는 것은 아니하는 점을 독자들은 이해해야 하겠다다시말해서 정치적이란 꼭 정치적 위상에 국한된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예를 들어 여인이 아름답고 싶은 것이나남자가 사내다움을 갖추려는 것이나운동선수가 세계적인 기록을 수립하여 스타가 되고자 하는 것이나예술인이 뼈를 깍는 인고의 노력과 창자를 쥐어 뜬는 배고픔을 견디면서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후세에 길이 전할 불후의 명작을 남기려는 몸부림이 모두가 인간만이 누린 정치적 성향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치적 성향은 이처럼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자신의 발전과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고 크게는 그 가문과 국가,민족의 영예를 드높이게 되는것이라 하겠다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며 패배자는 그늘에 가려지게 마련이다물론 승자가 패배자보다 반드시 우월하다는 법은없다승자보다 월등히 똑똑하면서도 행운의 여신이 웃음을 거두어 가거나 자신이 잘못지은 인연에 의해 패자가 되기도 한다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정치적 패배자의 귀양지요은신처이기도 했다.

정파싸움 과정에서 최고 통치자의 눈에서 벗어났거나 당파싸움에서 급속도로 그 세력이 위축되면 덮어놓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오지로 유배당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따라서 패배자로 제주도에 귀양을 오게 된 사람은 다행히 또 다른 정변이나 정치적 변화에 의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한 그곳에 상민으로 전락하여그곳 원주민과 더불어 농사일이나 어업에 종사하면서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 어업에 종사한 조부님 >

언제, 어떤 경로로 큰스님의 가문이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는 이 나라의 정계를 주름잡던 후예였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어업으로 생업을 이어갔었다고 전한다. 큰스님의 조부께서 익숙치 못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면서도 1년에도 수십번씩 풍랑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던 생활의 위험성과 험난함에 몸서리가 처졌던지 큰스님의 부친께서는 어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농업에 종사하게 하리라고 생각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미 배운 도둑질 같아 물일이 피할수 없는 생업이 되었지만 자식의 대까지 물려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지 큰스님의 부친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농사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 손자에게 한학을 익히게 한 조부님의 뜻 >

몰락한 양반의 후예에게 감히 글을 가라칠 용기있는 스승도 없었겠지만 우선 먹고는 살아가야 한다는 다급한 현실앞에 조부와 부친은 글을 깨우치지 못하셨고 오직 물일과 논밭일에 정성을 쏟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1919년 큰스님의 나이 여섯 살 때에 일어난 3.1민족운동에 자극받아 알아야 살아남을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조부와 부친은 어쩔수 없이 배우지 못했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늦게 얻은 손자 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생각에서 후세를 가르치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비록 몰락하여 물일과 논밭일에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검어지고 손발은 텄어도 옛 양반의 본질적인 꼿꼿한 자세와 정신마저 초라해지지는 아니했을 것 같다.

특히 큰스님의 조부는 비록 학문적으로 무식하기는 했지만 기개가 높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남다른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이 남보다 풍족하지는 못했을망정 비굴하게 누구에게나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어려운 중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돕고 구제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러한 유교적 선비정신은 귀하게 얻은 손자인 경보당 큰스님이 적령기에 이르었을 때 신학문대신에 한학을 하도록 했던 점에서도 조부의 정신을 엿볼수 있겠다. 손자에게 공부는 시킬망정 결코 왜놈의 앞잡이는 만들지 않겠다는 정신이 강하게 살아 있었음을 일붕 큰스님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통해서도 능히 알수 있겠다.

 

다음은 큰스님께서 기술인에게 들려준 회고담의 내용이다.

내가 적령기가 되어 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조부님께서는 크게 역정을 내시며 나를 이렇게 꾸짖으셨던 생각이 납니다. ‘학교공부를 하면 왜놈의 종노릇밖에 할 것이 없는데 그놈들에게 종노릇하려고 돈을 쳐들여가며 공부를 한단 말이냐 안된다하고 꾸짖으셨어요. 평소에도 엄하시지만 무척 인자하셨던 조부님께서 그처럼 크게 역정을 내시는 것을 나로서는 처음 본 일이고, 조부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유일하게 겪었던 역정이었어요.”

 

< 조부님의 선견지명>

그럼, 큰스님의 조부께서 사랑하는 손자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겠다는 것을 역정을 내면서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기로 하자.

큰스님의 조부께서 일본놈의 종노릇이라는 말을 들먹이면서까지 큰스님의 진학을 반대한 진정한 의미는 이 시점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큰스님의 조부께서 손자이신 큰스님을 남달리 귀여워 해주셨던 점, 부모로부터 들은 후일담을 통하여 조부를 생각해볼 때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조부님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조부님의 그런 선견지명이 없었던들 나는 세속인으로 살았을 것이며 오늘의 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합니다.”

큰스님은 밝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큰스님이 강조하시는 선견지명 말고도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운명적으로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될 큰스님께서 운명의 길을 가도록 도우셨다고 하겠다. 그것은 큰스님이 태어나신 날 큰스님의 조부께서 꾸신 기이한 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조부님의 꿈에 나타난 도사 >

그러니까 191459일 꼭두새벽이었다. 그날 새벽, 조부님은 기이한 꿈으로 잠을 설쳐야 했다. 며느리가 몸 푸는 날이 오늘내일 하던터여서 하루라도 빨리 며느리가 몸을 풀어 손자를 보기를 간절히 바라던 조부님이 그날따라 새벽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노란 도포를 걸친 도사 한분이 흔적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근엄하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오늘 너희집에 도사가 탄생할 것이니 각별히 사랑하며 키우도록 하라. 그가 장차 커서 도를 닦아 하늘 밑에 구름을 헤치고 날아다니며 천하를 주름잡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도를 펼칠 것이다그리고 도사는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참 신기한 꿈도 있구나라고 생각한 조부는 그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쓸고 동네어귀까지 길을 말끔히 쓸었다. 무식하지만 순박했던 조부는 집안을 쓸고 동네 고삿을 쓰는 것으로 귀인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집안 어른의 축복속에 태어난 큰스님은 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조부는 손자를 품에 안고, “우리 도사, 우리 도사라고 손 안의 보석처럼 애지중지했다.

조부는 귀여운 손자를 장래 도사가 되게 하려면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큰스님의 나이 여섯 살에 이르자 동네 서숙에 보내어 한학을 익히게 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일붕 큰스님은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심사가 어지러울 때나 한적한 시간에 선시(禪詩)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것도 조부님께서 나에게 신학문을 시키지 않고 한학을 시켰던 덕이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어요.”

 

--------------------계속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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