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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1-01 00:00
[불교어록방] 불신을 극복하는 길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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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가까와 진다.
 거짓말을 하고도 하지 않았다 하면
 그 뒤에 두 가지 죄를 함께 받나니
 스스로 제 몸 끌고 지옥에 간다."

- 법구경 -

요즘은 말 그대로 불신의 시대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치인의 말, 정부관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오히려 바보처럼 취급당하고 실제로 순진하게 믿었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절대로 못하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던 사람들은 갑자기 치솟은 땅 값, 아파트 값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산산조각이나 허탈감에 싸여서 정부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사는 농어촌을 만들겠다고, 농어민후계자를 양성해서 풀요로운 농촌을 만들겠다던 농경당국자의 말을 믿고 고향땅에 정착한 젊은이들은 이제 장가도 못가고, 오히려 빗더미 위에 올라 앉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남몰래 밤봇짐을 싸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다고도 합니다.

매일 매일 학생들의 데모가 그치지 않다가, 학생들이 선생니므이 손발을 묶고 머리를 깍는 일도 벌어졌고, 가장 존경을 해야할 선생님들을 원수대하듯 하다가 급기야 부산에서는 농성학생들을 연행하려던 경찰관들이 여섯명이나 불에 타죽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행동을 잘한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불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졌다할 지라도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입으로는 대자대비를 말하면서 남의 소중한 생명에 위협을 가하고 남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찰하려고 하는 행동은 그 뜻이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정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일부 불자들까지도 과격한 시위를 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개량주의자로, 기회주의자로 몰아부치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이긴 하지만 부산 동의대 사건 이후로 푝력을 자제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학생들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투쟁방향을 전환하고 있어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 같아 다행스럽긴 합니다마는 이런 무언의 합의가 얼마나 지속되느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조선대학교 학생 이철규군의 사망원인을 놓고 모처럼 조성된 화합의 분위기가 몹시 염려스러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공식적인 사망원인을 익사라고 발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어떤 발표가 나오더라도 믿을려고 하지 않는 국민들의 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국민들을 탓할 수 만도 없는 일입니다. 믿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찾아서 이를 제거하는 노력을 함으로써 이런 불신풍조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불신풍조의 원인이 무엇이냐?
이에 대한 해답을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정치하는 사람들. 종교인. 교육자. 재벌 등 소위 이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이 과거에 숱한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그 사람들의 말을 신용할 수 없는데 있다고 보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부에서는 민주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도 민주화를 하지 않는다고 폭력으로 대항하고, 사업주들은 최선을 다해 타협하겠노라고 해도 대화로 해결하지 않고 타협보다는 파업을 앞세우는 것은 정부나 정치가, 교수, 사장- 이런 사람들의 말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느 사회나 갈등은 있기 마련입니다. 도인들만이 사는 세상, 극락 세계에나 갈등이 없을까, 욕심을 가진 중생들의 세상은 갈등이 없을수 없습니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모자간에도 갈등이 있고, 그대 없이는 못산다고 목매달던 청춘남녀가 서로 결혼을 해도 부부간의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화로써 해결하느냐? 아니면 폭력으로 해결하느냐?
삼척동자라도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할것입니다.

그러면 왜 대화와 타협이 안되느냐? 당사자들이 상대편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거짓말을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에 관한 일화로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목동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치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이 목동이 어느 날 이리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해서 마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소년은 재미를 느낀 나머지 거듭거듭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짜로 이리가 나타났고, 목동은 죽을 힘을 다해 마을로 달려가 목청껏 "이리가 나타났다"고 외쳤지만 여러번 속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되풀이 함으로써 맞게되는 무서운 결과를 풍자한 우화입니다.

우리사회가 불신시대가 된 것은 그동안 지도층 사람들이 마치 우화에 나오는 목동처럼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한번 하고 나면 다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거짓말의 속성입니다. 먼저한 거짓말을 합리화시키려면 여러개의 거짓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말틴 루터 킹>목사는 "하나의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일곱개의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고, 걸리버여행기를 지은<제이.스위프트>는 20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거짓말을 부득이 해야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경전에도 거짓말을 해서 죽을 목숨을 살리는 경우라면 거짓말이 죄가 되 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냥꾼에게 쫓긴 노루를 숨겨주고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라든지, 그 외에도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일화는 경전이나 야담 가운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초발심자경문>에도 <수오계 십계동 선지지범계차(受五戒 十戒等 善持知犯戒遮)>란 말이 있는데, 오계나 십계를 받아 이를 잘 지키되, 때로 이를 범하는 경우는 잘 가려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꼭 이처럼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의 생활에 거짓말이 때로는 생활을 즐겁게하는 경우도 있고, 꼭 필요한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악의없이 사실을 과장한다거나 더 아름답게 이야기하는 것도 거짓말이긴 하지마 대대부분의 문학작품은 이런 거짓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암에 걸린 환자에게 암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인도적인 배려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 한다고 합니다.

거짓말에도 악의의 거짓말과 선의의 거짓말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선의의 거짓말도 자주 하게 되면 결국 습관이 되고, 남이 믿어주지 않는 결과를 가져와도 뜻하지 않은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짓말이라도 이는 마치 독약과 같아 한 두번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반복하게 되면 나중에는 꼭 믿어주어야 할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좋은 의미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라도 자주 하면 결국은 교육적으로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가급적이면 서의의 거짓말이라도 자주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위해 부득이 하는 거짓말이라도 아편처럼 두렵게 생각하고 사용해야 됩니다.

특히 보살님들은 절에 다니면서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시다가 서로 무릎맞춤하는 일도 종종 있고, 스님네들의 이야기를,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서 많이들 하시는데 거짓말을 하면 구업을 지어 과보를 받게되고, 자주하게 되면 마침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허풍쟁이로 낙인찍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일은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거짓말이 우리 사회에 만연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불신풍조가 청소년들에게까지 미쳐서 제자가 스승을 믿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말하는 자신의 이 거짓말로 인해서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는데, 지옥고통은 죽은 후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에도 받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제5공화국 시절에 거짓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속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떤 환경에 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더러는 감옥에 가 있고, 어떤 이는 귀향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짓말로 남에게 원한을 사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합니다.

<법구비유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불가사'라는 왕은 출가하여 라자그라하성에 들어가 결식을 하다가 새끼 낳은 암소에게 떠받쳐 죽고 말았습니다. 소 임자는 잔뜩 겁을 먹고 그 소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소를 산 소 주인은 그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끌고 갔는데 이 소가 다시 새주인을 들이 받아 역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소 주인의 아들은 화가 나서 소를 잡아 장에 나가서 고기로 팔았는데, 어느 한 시골사람이 그 소머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무밑에 이르러서 소머리를 끈으로 묶어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그 소머리 아래에 누워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머리를 매단 끈이 끊어져 쇠뿔이 가슴에 떨어져 그 사람도 죽고 말았습니다.

소 한마리가 하루 동안에 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하도 괴이한 일이라 부처님께 나아가 이 사실을 말하고 그 연유를 물었더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옛날 세 사람의 상인이 외국으로 장사를 나가 어느 홀로사는 할머니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숙박비를 물기로 하고 유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상인은 노파가 혼자사는 것을 알고는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 달아나 버렸습니다. 노파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쫓아가서 이들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벌써 값을 치렀는데 왜 또 달라하느냐?"하고 오히려 욱박지르면서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이들을 저주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아무리 곤궁한들 이 협잡을 어찌 참겠는가. 만일 내가 후생에 태어나는 곳에서 너희들을 만나면 기어코 죽이겠다. 비록 도를 얻더라도 용서하지 않고 죽이고야 말것이다." 이렇게 맹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힘없는 할머니지만 이처럼 독한 마음을 먹고, 죽어서 암소로 태어나 거짓말을 한 세사람을 차례로 복수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남을 속이고 자기이익을 얻기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임시방편으로 악의없는 거짓말을 한다해도 결국 자녀들에게 불신을 심어주고 부모뿐 아니라 사회 모든 사람들의 말을 믿지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먼저 자기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솔직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함으로써 거짓말장이 부모가 되기 보다는 좀 무식한 부모가 되더라도 진실한 부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요즘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라서 갖가지 새로운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어느 신도님은 국민학생 자녀가 교과서에 나오는 문제를 질문하는데, 몰라서 당황하는 일이 많다고 하소연 합니다. 모른다고 하면 "엄마는 그것도 몰라"하고 무시를 할까 봐 잘 몰라도 아는체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큰 잘못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같이 연구해보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무식한 엄마>를 면하기 위해서 모르는 것을 아는체 했다가는 나중에<거짓말장이 엄마>가 되고 맙니다.

요즘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많은 세상이라서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거짓공약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기 주변사람들에게 거짓 공약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같은 말이라도 부드러운 말을 합시다. 말로써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말을 씀으로써 먼저 가족과 이웃을 대하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노력을 하게 되면 결국 사회는 정화될 것입니다.

말은 부드러운말, 상냥한 말이라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흐뭇하고 의사소통이 잘될텐데 갈수록 우리의 말씨는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말씨를 잘 살펴보십시오. 상스러운 말 거치른 말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거치른 말을 쓰다 보면 거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스위스 속담에 "말은 꿀벌과 같아서 꿀과 침을 가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꿀과 같이 달콤하고 우리를 이롭게 하지만 잘못하면 벌의 독침과 같이 사람을 해친다는 뜻입니다.

중국 속담에"세치의 혓바닥으로 다섯 자의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말만 잘하면 천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거친 말씨들을 예사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쓰는 말 가운데도 거친 말이 들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부싸움을 잘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부모가 큰 소리로 싸우는 것을 보고 온연중에 그 말투를 흉내내게 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게 사람이 세상에 나면
 그 입 안에 도끼가 있어
 그 것으로 제 몸을 베나니
 그 것은 나쁜 말 때문이니라"

부산 동의대 참사이후로 학생들이나 근로자들도 무분별한 폭력을 삼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고, 이제 화염병과 최루탄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망증이 심해 조금만 지나면 지나간 불행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폭력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이 노력도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왜 폭력을 통해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했는지 그 원인을 냉철히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불자여러분,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든지 정치가에게 좀 더 정직한 사람이 되야한다든지 이런 말은 법회에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보아야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대통령, 정치가 재벌들을 직접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거짓말은 지옥에 가까와 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입 안에 도끼가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기왕이면 극락에 가까와지는 말만을 하고, 입안의 도끼로 제몸을 상하게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진실한 말, 자비스러운 말이 넘쳐흐르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불자들이 앞장서 정화합시다.
그리하여 서로 믿고 사는 세상을 만듭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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