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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3-03 00:00
[전문불교코너]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글쓴이 : 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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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신이 아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신격화하기를 거부한다.

상응부경전의 밧카리라는 경을 보면 병든 비구 밧카리가 주인공이된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붓다의 모습을 뵙는 일이 소원이었다. 붓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밧카리를 찾았다.

"대덕이시여, 이제 마지막 소원은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뵙고, 두 발에 정례(최대의 경계)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밧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한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나니 마땅히 이렇게 알라."

병든 제자의 머리 맡에 앉은 붓다의 마음은 동고동비의 생각으로 가득차 측은한 마음 누를길 없었다. 그러나, 밧카리를 놀라게 하고 동석한 비구들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죽어가는 비구에게 자기를 예배하고자 하는 청을 거부하고, "너는 나를 보려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설한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있어 가르침과 행동의 수범을 보여서 인도자가 되어 선두에 서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불교라 해도 교조를 중심으로 한 종교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와 같이 신의 아들도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도 아니고 속죄자나 심판자도 아니다. 기독교에서와 같이 예수가 중심관념을 이루고 그에 관해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입장과는 다르다.

불교에도 교조인 "붓다"에 대한 신앙고백은 있다. 바로 삼귀의가 그것이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달마님께 귀의합니다. 승가님께 귀의합니다." 이 삼귀의에서 부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첫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가 법을 알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니까, 그 지혜와 인격에 마음으로부터 신뢰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뜻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붓다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 이런 표현이 자주 경전 속에 나타난다. "붓다에 대해 무너짐이 없는 믿음을 지니노라. 세존께서는 응공, 정등각자,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타, 세존이시다."

여기에 열거한 어마어마한 열개의 이름은 옛부터 붓다의 십호라고 일컬어 지는 것이니와, 그것들을 설명하면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응공), 샅샅이 깨달은 사람(정등각자),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명행족), 다시는 윤회를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선서), 이 세상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세간해), 모든 중생의 스승인 사람(천인사), 가장 높은 사람(무상사) 마음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사람(조어장부), 진리를 깨달은 사람(세존)이란 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인간임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존재로서 인식하지 않았다.

불교는 인간이 자기 형성의 길이다. 신의 은총으로 천국에 가는 길도 아니며, 더더욱 많은 복을 받겠다든지, 역량 이상의 영광을 얻겠다든지 하는 것일 수는 없다. 오직 한가지 잘조어된 자기를 확립함으로써, 거기에 궁극의 자유와 안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험한 길이다. 신의 은총없이 오직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그 힘을 복돋아 주는 것이라고는 다만 부처님의 수범과 그 가르침과 그리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법의 형제들과 맺어지는 우정의 손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세가지 귀의처, 즉 불, 법, 승 삼보 그것이다. 기독교가 철저한 "신의 종교라면 불교는 철두철미한 인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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