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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1-12-12 00:00
[전문불교코너] 의천 대각국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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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生涯)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高麗)가 가장 흥륭(興隆)하던 시기인 제11대 문종(文宗) 9년에 탄생하여 제15대 숙종(肅宗) 6년에 입적한 (1055~1101) 고승(高僧)으로서, 대학자(大學者)이며, 대사상가(大思想家) 이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는 문종(文宗)의 넷째 왕자로 탄생하였다. 성(姓)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자(字)는 의천(義天) 이었으나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字)인 의천(義天)을 통용하였고, 시호(諡號)가 대각국사(大覺國師)이다. 국사는 본시 왕자로 출생하였지만 왕가(王家)의 부귀(富貴)에 조금도 탐착(貪着)하지 않아 11세 때에 부왕(父王)의 명을 받아 경덕왕(景德王師) 난원(爛圓)을 스승으로 하여 득도(得度)하고 영통(靈通寺)에서 수행(修行)하였다. 출가(出嫁)한 뒤 연학(硏學)과 수행(修行)에 크게 정진(精進)하여서 안으로는 불서(佛書)를 정연(精硏)하여 대·소승(大·小乘)의 경전을 모조리 탐구(探究)하였고 밖으로는 외학(外學)에까지 박람(博覽)하여 유학과 노장사상 등 제자(諸子百家)의 전적(典籍)을 섭렵(涉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13세 때는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祐世僧統)의 지위에 올랐으며 스승 경덕왕사(景德王師)가 귀적(歸寂)한 뒤인 21세의 약관(弱冠)으로서 그 후학들을 맡아 강학(講學)을 하여 명성이 천하에 드날렸다. 국사는 이렇듯 수행(修行)과 학문(學問)을 원만히 성취하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한층 더 자신의 견문(見聞)을 넓힌 것은 물론 불교서적의 수집과 완비(完備)를 꾀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에 구법(求法)의 길을 떠날 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송나라에 대표적인 학승(學僧)은 진수 정원법사(晋水淨源法師)라 소문을 듣고 먼저 그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송(宋)나라에 건너갈 의사를 표하여 유학 절차를 문의하였고, 아울러 불교계의 소식을 서로 교환하였다. 또한 부왕(父王)인 문종(文宗)에게 표(表)를 올려 옛날 원광(圓光), 의상(義相)등이 중국에 건너가 구법(求法)하던 사례를 들고 또 정원(淨源)으로부터 받은 회신(回信)에 '송(宋)에 건너오라‘는 간곡한 청장(請狀)을 인용하여 자신도 송에 구법 유학을 떠나겠다는 소망과 결의를 밝혔다. 그러나 부왕은 송나라로 구법을 위해 떠나는 길이 첫째는 해로상(海路上)의 위험이 많이 있는 것과 둘째는 당시 요(遼)나라와의 외교상 미묘한 문제 등을 고려한 나머지 구법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사의 유학 결단은 일단 중단이 되었지만 정원법사와의 교류만은 계속되어 그의 초상을 얻어 보기도 하고, ‘화엄보현행원참의(華嚴普賢行願懺儀)’등 그의 저서를 탐독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웠다. 부왕(父王)이 승하(昇遐)한 뒤 큰형인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니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둘째 형인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그 해에 국사는 송나라로의 구법유학을 선종(宣宗)에게 재삼 간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국사는 선종(宣宗) 2년(1085)인 30세 때 모후(母后)와 선종(宣宗)에게 편지를 남기고 미복(微服)차림으로 제자인 수개(壽介)등 2인을 데리고 송(宋)나라의 상선(商船)을 타고 구법유학의 길을 떠났다. 국사가 송나라에 도착하여 입국(入國)의 이유를 철종에게 표문(表文)으로 올리니 정중히 맞아들여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철종은 국사를 수도 변경 계성사(啓聖祠)에 머물도록 하고 화엄(華嚴學)의 대가(大家)인 유성법사(有誠法師) 등을 천거하여 불학(佛學)에 대한 강론을 하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현수(賢首)와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중국 혜인사(고려사) 전경(목판본) 송도변경에서 한달 여를 지낸 뒤에 다시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揚桀)의 안내로 전에 서신교류가 있었던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찾아 항주(杭州)의 혜인원(慧因院)을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항주(杭州)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중국 불교 제종(諸宗)의 많은 학승들과 만나 교학을 담론하였다. 특히 국사는 정원법사와 만나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교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자변(慈辨)대사와 영지사 원소율사(元炤律師)와의 교유가 깊어 천태교관과 계율과 정토교학에 관하여 폭넓은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지자탑원 또 천태산(天台山)에 가서 중국 천태(天台學)의 창도(唱導者)인 천태대사(天台大師)의 부도(浮屠)를 참배(參拜)하고 그의 탑아래에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고려해 널리 전하겠다’는 발원(發願)을 하였다. 이렇게 송(宋)나라에 체류(滯留)한지 14개월 동안에 중국의 명산(名山) 불적(佛蹟)등을 두루 찾아보고, 당시의 고승대덕(高僧大德) 50여인을 만나서 법요(法要)를 담론(談論)하였다. 유성(有성(誠)), 정원(淨源), 회연(懷璉) 등을 만나서는 선(禪)의 본지(本旨)를 결택(決擇)하였고, 천길상(天吉詳) 등을 만나서는 범학(梵學)에 대하여 문의하는 등 불교의 여러 종학(宗學)을 빠짐없이 강론(講論)하였다. 국사가 송으로 출국할 당시 많은 불교관계 전적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항주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 들었고, 그 전적을 중심으로 뜻 깊은 토론도 전개되었다. 결국 국사의 송나라유학은 무종(武宗)의 불교 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불교관계 서적들이 거의 없어진 중국 불교에 제2의 중흥기를 맞게 하였다. 한편, 본국(本國)에서는 모후(母后)인 인예태후(仁睿太后)가 국사가 외국(外國)으로 멀리 떠나가서 오래 있음을 염려하는 뜻이 너무나 간절하기에 선종은 모후의 뜻에 따라 송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국사가 속히 귀국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국사는 선종(宣宗) 3년(1086) 본국(本國) 조하회사편(朝賀回使便)에 수반(隨伴)하여 귀로(歸路)에 오르면서 불교경전의 장소(章疏) 3000여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신편제종교장총록 본국에 돌아온 국사는 부왕(父王) 문종(文宗)이 창건한 흥왕사(興王寺) 주지(住持)로 있으면서 천태학(天台學)을 조직(組織)하는 한편 불교서적의 수집과 정비에도 힘써 요(遼), 송(宋), 일본(日本) 등 여러 나라의 불교전적을 널리 구입하였다. 이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간행에 힘썼으니 이를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이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하여 먼저 목록집(目錄集)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선종(宣宗) 7년(1090)에 작성하였다. 그러나 국사는 송에서 수집한 불교서적이외에 당시 국내에 유통되던 불전(佛典)을 수집하기 위해 선종 8년(1091) 봄에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분황사 전경 국사는 먼저 영주 부석사에 내려가 분황사에서 원효스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국사는 분황사 참배이후 호남지방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면서 모악산 금산사, 고대산 경복사, 선암사, 송광사, 백양사, 화엄사를 참배하였다. 이 기간동안 국사는 중국에서 수집한 양보다 많은 4천여 권이라는 엄청난 불전을 수집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행된 속장경 간행 사업은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인 1102년에 완성되었다. 해인사 전경 이렇듯 방대한 불사에 헌신한 국사는 전남 승주 선암사와 흥원사를 거쳐 선종(宣宗) 11년(1094)에 해인사(海印寺)에 은거(隱居)하며 요양과 수행을 하였다. 제15대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른 뒤 그의 간청(懇請)에 의하여 다시 흥왕사(興王寺)로 돌아왔으며 숙종(肅宗) 2년(1097) 국청사(國淸寺)가 준공(竣工)되자 초대(初代) 주지로 취임(就任)하면서 천태종(天太宗)을 완성하였다. 초대 주지로 취임한 국사는 이곳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으며, 이때 모여든 고승들이 1천여 명이 넘었다. 이로써 천태종이 개립되면서 1099년에 이르러서는 제1회 천태종 승선(僧選)이 행해졌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종파가 된 것이다. 숙종의 열렬한 외호를 받아 국청사를 천태종 근본도량으로 하여 천태교학을 강의한, 당대의 신진학승들이 거의 다 천태종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구산선문의 선종과 화엄종의 유능한 승려들이 대부분 천태종으로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행적을 남긴 국사는 숙종(肅宗) 6년(1101)에 세연(世緣)을 마치고 시적(示寂) 하였으니 향년(享年) 47세, 법납(法臘)이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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