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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2-28 12:50
[불교어록방] 지장스님<알기쉬운 불교교리>
 글쓴이 : 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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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전의 번역

실론의 불교와 같이 인도에서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라도 있지만, 중국의 불교와 같이

자기말로 번역하여 받아들인 민족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중국의 언어로 번역된 한역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오늘에 이르렀거니와, 중국의 언어로 번역된 과정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인도와 중국과는 언어학적 거리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불교가 이 두 민족을 접근시킬때까지 양자간에는 정치적,문화적인 교섭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런 사정 아래서 불교라는 고도의 사상을 표현한 문헌을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 옮겨놓는다는 사업이 얼마나 곤란했을까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중국에서의 역경은 대략 천년에 걸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흔히 제왕의 보호와 후원아래 국가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 역경장에서의 번역사업은 오늘의 번역과 같이 개인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구마라습이 주관했던 역경장 소요원에서 일한 사람은 무려 8백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송나라 역경원 ()제를 살펴보면,

역주(譯註), 정면의 좌석에 앉아 원본의 산스크리트 문장을 낭독한다. 역자로서 번역된 경전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이 역주다.

증의 (證義), 역주의 왼쪽 자리에 앉아, 역주를 도와 산스크리트 원문을 평량(評量)한다고 되어 있다. 역주와 더불어 원문의 구성이나 의미를 검토하는 직책이다.

증문 (證文), 역주의 오른편에 앉아, 역주가 낭독하는 산스크리트 문장을 듣고 그 글자, 발음에 관해 검토하는 직책이다.

서자 (書字), 산스크리트 원문의 낭독을 자세히 듣고 그 음을 중국 글자로 나타낸다.

즉 범음(梵音)을 한자로 음사(音寫)하는 것이다. 예컨대 Sutra를 음사하여 수다라(修多羅)로 함과 같다.

필수(筆受), 범음을 옮겨서 중국어로 만든다. 여기서는 음사의 단계에서 의역이 행해진다. 이를테면 <수다라>를 번역하여 <()>이라 함과 같다. 단 여기서는 아직도 단어를 번역하는 단계이다.

철문(鐵門), 문자를 연결시켜 구절을 이룬다. 번역된 단어를 중국어의 문법에 맞는 순서로 배치하는 것이다.

참역(參譯), 양국의 글자를 검토하여 잘못이 없게 하는 직책이다. 즉 번역문을 다시 한번 원문과 대조하여 검토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장을 다듬는 단계로 들어간다.

간정(刊定), 지리한 데를 깍아. 구절을 결정한다. 문장의 검토다. 무무명(無無明)을 명()으로 함과 같다.

윤문(潤文), 승려로서 임명하고 남향하여 자리를 잡는다고 하며, 역주(譯註) 다음가는 중요 직책이다. 그 임무는 문장의 마지막 손질이다. 예컨대 <반야심경>의 일체고액(一切苦厄) 같은 구절은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없는데, 이를 윤문이 문장을 손질할 때 집어넣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제의 직책을 보아서도, 역경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영위되었는가를 눈에 보듯이 전해 준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쓰이고 있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의 대부분은 범어경전(梵語經典)를 번역한 것이다.

이 범어는 인도 유럽어계(語系)에 속하여 독일이나 영어와 어원(語源)이 같고 가로로 쓴다.

그것을 전혀 다른 어계(語系)의 한문으로 번역하였으니,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전해진 1세기 후반부터 2.3세기까지의 번역은 졸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316년에 서진(西晋)이 망하고 오호시대(五胡時代)가 되자 질()과 양()이 뛰어난 중요경전이 번역되었다.

 

구자국(龜玆國)의 불도징(佛圖澄 232-348)이나 그 제자인 석도안(釋道安 314-358)은 많은 절을 지어 제자들을 기르는 등 불교의 중국화에 노력했으며, 도안(道安)의 제자인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335-417)은 인도나 서역(西域)의 역경승(譯經僧)을 맞이하거나 제자들 사역땅에 파견했었다.

 

법현(法顯 335-421년경)등의 구도승(求道僧)이 인도를 향해 장안(長安)을 출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후부터 중국에는 다섯사람의 위대한 역경승(譯經僧)이 배출되었다.

그 이름은 구마라습(鳩摩羅什), 현장(玄獎), 진체(眞諦), 의정(義淨). 불공(不空)이다.

 

구마라습은 구자국(龜玆國)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났고 융안 5(401)에 장안에 맞아들여져 3백수십권의 경전을 번역했으며 그 중에는 아미타경(阿彌陀經),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반야경(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이나 중론(中論).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성실론(成實論) 등 중요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현장(602-664)은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지며, 하남성(河南城)에서 태어나 629년 장안(長安)을 떠나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건너가서 각 불적(佛跡)을 둘러보고 645년에 귀국했는데, 650부에 이르는 경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은 장안의 역경원에서 19년간 제자들과 함께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대반야경(大般若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구사론(俱舍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섭대승론(攝大乘論)등이 있다.

 

진제(眞諦 499-569)는 서북인도 출신으로서 파라미아르타라고 하며, 546년에 바다 배편으로 중국에 건너가서 혼자의 힘으로 금광명경(金光明經), 섭대승론(攝大乘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일부등을 번역해 냈다.

 

의정(義淨 635-713)은 당대(唐代)의 역경승으로서 법현(法顯)과 현장(玄獎)의 뒤를 이어 671년에 광주(廣州-廣東)에서 해로로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에 가서 약 4백부의 범어경전(梵語經典)을 낙양(洛陽)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그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4권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2권은 당시의 풍속을 아는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화엄경(華嚴經)의 새로운 번역사업에도 참가했다.

 

불공(不空 705-774)은 북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의 역경승으로서 아마가봐쥬라고 하여 720년에 낙양으로 건너가서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다. 한번 스리랑카로 건너가서 밀교경전(密敎經典)을 모아 귀국했으며 금강정경(金剛頂經)외에 80부 이상의 밀교경전(密敎經典)을 한역(漢譯)했다.

 

이같은 역경승들 덕분에 오늘 경()이라고 하면 한역경전(漢譯經典)을 가리킬 만큼 중국적인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경전 가운데는 한역할 수 없는 범어의 불교술어가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들면 마하(摩訶)는 범어의 <마하>, 바라밀다(波羅密多)<파라미타>의 음사(音寫)인 것이다. 이런 술어는 <불번 (不飜)>이라 하여 그대로의 발음에 한자를 표기하였다.

또 범어의 원전에는 없는 <()> 라든가 <()><()>라는 중국의 독특한 술어를 새로이 경전에 삽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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