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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7-06 21:29
[인물포커스] 일붕 서경보대종사 전기<붕새의 꿈과 기적>
 글쓴이 : SBC불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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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화엄사 시절

 

< 지리산과 화엄사 >

경보스님이 목표로 가고 있는 지리산은 반도 제일의 큰 명산이다. 그로 그럴것이 지리산은 북으로 충청북도, 서로 전라남도, 동으로 경상남도 이렇게 3개도를 걸쳐 8개군에 걸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지리산은 크게 내산과 외산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내산은 영원사(靈源寺). 벽송사(碧松寺). 실상사(實相寺). 대원사(大院寺)의 네 사찰이 있고, 외산에는 경보스님이 묵고자하는 화엄사(華嚴寺)와 천은사(泉隱寺)가 있었다.

지리산 줄기는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세석평전.벽소령.만야봉을 거쳐 노고단까지 장장 200여리에 걸쳐 뻗어있는데 화엄사는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30리 쯤 내려간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 화엄사의 창건 연기 >

화엄사의 창건은 삼국시대 때의 백제의 연기조사(緣起祖師)에 의해서 창건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의상조사(義湘祖師)의 화엄전교(華嚴傳敎)로 인하여 국내의 유명한 대찰이 되었다. 이 사찰이 한참 전성기에는 현재의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丈六殿)의 거대한 건물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당호가 즐비하였고 부근에 72개 소의 암자를 거느렸으며 승려수가 무려 3천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헤아려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을 당하여 목조건물은 모조리 불타버리고 석탑.석등들의 석조물만이 겨우 남아있었는데 이조의 인조-숙종 때에 벽암대사(碧岩大師)가 현재의 건물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사찰의 이름이 화엄사로 명명된 것은 의상조사께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강설했던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화엄사는 남해 일대에서는 승주의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명찰로 불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봐야 하는 사찰이요, 일붕 서경보 큰스님께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깨친 인연깊은 고찰이므로 독자들을 위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화엄사에 얽힌 전설 등을 여기에 적어볼까 합니다.

 

절의 배치는 광활한 수 만평의 터에 시원시원하게 당호를 배치했다. 일주문을 거쳐 경내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금왕문이 있고, 왼편에는 덕장전이 자리잡고 있다. 다시 천왕문을 지나면 넓직한 마당이 있고, 거기를 지나면 보제루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왼편이 종각이고 오른편에 위치한 것이 적묵당이다. 보제루를 지나면 거기가 바로 화엄사 도량의 중심부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양쪽의 5층석탑과 대웅전 서쪽에 위치한 각황전 앞에 있는 수려하고 정교한 석등이 14백 여년의 모진 풍상을 격고도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불교문화재이다.

 

현재의 각황전은 임진란 후에 중건된 것이다. 임진왜란 전의 건물로 6각형의 3층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180권의 화엄경을 범문(梵文)과 한문을 청석에 새겨 전각의 내부4면 벽쪽에 붙여놓았던 국내 유일의 석경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전각이 불타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지고 말았다. 지금은 그 파편 18천여 조각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 연기조사와 3층 사리탑 >

각황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자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3층 사리탑이다.선이 굵고 장중한 신라의 석탑과는 달리 선이 부드럽고 경쾌하여 그 우아한 모습은 옥개와 탑신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같은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3층 사리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인 동시에 이 절을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의 효성이 어린 탑으로도 유명하다. 조사가 어려서 이 산에 입산수도할 적에 그 어머니가 지식이 보고싶어 한번 만나보시를 간절히 원했으나 조사는 세속의 정에 마음이 흔들릴 것을 걱정하여 끝내 만나주지 아니하자 어린자식을 보고싶은 나머지 떳떳히 자식을 만나보기 위하여 불법에 귀의하여 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3층석탑의 기둥역할을 하는 다섯 마리의 사자 중 한쌍의 사자로 된 탑 기둥의 중앙에 사리함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입상이 바로 조사의 어머니상이고,그 앞에 있는 좌상이 조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대사가 한쪽 무릎을 끓고 공경을 표시하고 한손에 감로수병을 들어 효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이 절에는 앞의 유물들 외에 선조대왕이 하사했다는 서산대사의 발우대와, 인조대왕이 하사했다는 벽암대사의 가사가 보존되고 있다. 선조대왕과 인조대왕이 이들 물건을 하사한 것은 서산대사가 이룩한 임진왜란 때의 공적과 이 절을 중건한 벽암대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암자 규모의 작은 사찰밖에 보지 못했던 일붕스님에겐 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원시원한 경내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신라.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서 천하만민을 계도하였다고 하더니 유적만 보아도 과연 그랬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붕 큰스님은 화엄사에서 첫날을 보낼 때의 감회를 이렇게 회억(回憶)하고 있었다.

새벽하늘을 가르며 짙은 안개 속으로 길게 메아리치는 종소리의 긴 여운이었어요. 종소리는 멀리 가까이에 세게 약하게 끊기는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곤 또 가물가물하게 사라지는 듯 멀리 여울져 갔지요.”

 

일붕 큰스님은 먼저 구간 대선방에서 겨울 삼동을 지나고 해제(解制)한 뒤에 비로소 진진응(陳震應) 강백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기초가 튼튼했기에 곧바로 화엄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화엄경은 사집과 사교를 보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이었으나 이미 유경(儒經)을 끝냈으므로 문력(文力)을 인정받았기에 청강을 허락받게 되었다.

 

< 진진응 스님의 가르침 >

진진응 강백은 구례군의 유명한 고박사. 황박사와 더불어 구례군의 3박사로 불리우던 석학으로 그 식견이 고매하고 기억력이 절륜하여 범학(凡學)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진진응 강백은 경허(鏡虛)스님에게 선지를 받아서 문자견성을 하셨다는 선과 교를 겸한 고덕이어서 그의 경전에 대한 의리(義理)의 설명은 실줄이 풀리듯하여 무궁무진했던 것으로 정평이 있ㄷ. 또한 강백은 사학에도 밝으시어 한국역사와 불교역사에 대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으셨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은사이신 진진응 강백에 대해서 또한 당신이 익히신 화엄경에 대해 이렇게 구설하셨다.

 

화엄경을 처음 대하니 마치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가는 격이어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진진응 강백의 해맑은 강설을 듣고 훤하게 화엄경을 이해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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