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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5-31 19:52
[불교어록방] 지장스님 <알기쉬운 불교교리>
 글쓴이 : 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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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구를 위한 수행인가?

종교의 일반적인 사회기능(社會機能)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사회와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크게는 전체 인류)에게 행복에의 소망을 갖게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순화(醇化)하며 제도(制度)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 입장인가?

불교 역시 이에 다를바 없다. 그렇다. 불교 자체의 역사속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켜온 것이 있었으니, 출가(出嫁)자의 수행이 뭣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있었다. 일반 신도들의 신앙. 수행도 논쟁 밖에 따로 설수는 없다.

흔히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하여 자기의 해탈(解脫)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남을 구하는 일을 생각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소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삼고 있는 아라한(阿羅漢)이란, 번뇌를 전혀 멸()한 사람이란 뜻인데,혼자서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는 성자의 이상을 비겁한 것으로 몰아 세웠던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을 닦는 길로서 자리(自利)일변의 길이라고 맹박하였다.

 

우리나라도 대승불교권에 속해 있거니와, 대승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불교의 이상상(理想償)을 내세운다. 보살은 위로 보리(불타 정각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두가지 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잠시동안 자기의 정각 추구를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중생구제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고 대중구제를 위한 보살행위이야말로 불교의 기본적인 이상 실현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대승과 소승을 놓고 어느쫏이 우수하고 어느쪽이 옳은것인가를 논단하는 것 보다는 불교 수행의 근본목표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한 사람의 행복을 닦는 길 : 붓다의 길은 인간형성의 길이다. 그 사상 체계나 실천덕목 모두가 자기 형성의 길에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 붓다가 그 제자들에게 설한 것도 역시 그랬다. 그들은 먼저 가르침의 도리를 잘 이해할 것이 요구되었고, 그 이해에 따라 수행함으로써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도록 인도되었다. 그것이 자기형성의 길이었음은 명백하다

<법구경>의 한 게송을 보자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 뿐이지

그 밖의 어느것을 의지하리요.

자기가 잘 제어될 그 때,

얻기 어려운 의지처 얻으리.

 

이러한 부처님이 가르친 길의 기본적 성격 때문에 부처님 당시만 해도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을 닦는 길이라고 규종하려 했던 자들도 없지 않았음을 경을 통해 볼수 있다.

부처님이 제타 숲의 정사에 계실 때 상가라바라는 바라문이 찾아와서 물었다.

우리들 바라문은 신 앞에 제사를 지내고 희생을 드려서 자기와 타인을 위해서 재앙을 쫓고 복을 불러오는 길을 닦는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이 출가해서 하는 행위를 보건대, 자기를 제어하고 자기를 확립하며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것은 자기 한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을 닦는 것이 아닌가.”

 

만인을 위한 수행 : 앞의 질문, 이같은 고발에 대하여 부처님의 대답을 들어보자.

바라문이여,나는 그대에게 묻고 싶다. 생각대로 대답해라. ”

부처님이 즐겨 쓰던 반대질문의 수법으로 다시 물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여래.정각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설했다고 하자. <이것이 길이다. 이것이 실천이다. 나는이 길을 가고, 이 실천을 닦음으로써 번뇌가 이미 다하고 자유(해탈)을 얻을 수 있었다. 너희들도 이리 와서, 함께 이 길을 가고 이 실천을 닦음으로써 번뇌를 없애고 자유를 얻어라> 이같이 여러 정각자가 법을 설한 결과 여러사람이 이 길을 따르게 되어, 자유를 얻은 자가 수백,수천,수만에 이르렀다면 ,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와같이 되어도 역시,이 길은 한 사람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그렇지않으면 많은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고타마여, 그렇다면 출가의 행위는 많은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아함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말씀한 자기 형성의 길은, 여전히 자기를 위한 길임에 틀림없다. 다만 인간, 사람들의 사이, 이 세계의 미묘한 상관관계의 구조가 혼자의 길로 끝나게 하지 않은 것 뿐이다.

 

<권청>의 경을 보면 부처님이 전도를 주저하고 있을 때 범천(梵天)이 권청하여 설법하게 하였다. 범천이란 인도인이 받들어 오던 신이다. 고대 인도인의 문학적 수법은 거의 심리묘사를 무시하는데 특징이 있었거니와, 여기에서도 나쁜 생각은 악마의 속삭임으로, 훌륭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범천 같은 신을 등장시켰다. 이것은 불교경전의 문학형식의 상례다. 범천설화의 신화적 양식을 가지고 표현하고는 있으나, 어떻든 그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적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이성은 차겁게 자기 아닌 남을 헤아리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전도를 선언하고 나설 때 처음으로 <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말을 썼지만 결코 처음부터 중생제도를 위해 출가했던 것은 아니다. 출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있었다.우리는 여기에서 그 본질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