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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5-31 19:42
[인물포커스] 일붕 서경보대종사 전기<붕새의 꿈과 기적>
 글쓴이 : SBC불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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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경보스님 뭍에 오르다

 

< 중이 된 모습에 실망한 가족들 >

산방사와 법정사를 오가며 참선공부와 기도를 하다보니 어느듯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냥 참선이나 기도를 할것이라면 제주도 안에도 10여곳의 사찰이 있어 별문제가 없는 일이겠지만 어렵게 승낙을 얻어 승려생활을 하는 몸이니 이왕이면 좀더 깊이 불교의 교리를 파고들어 교학적을 더욱 불교를 이해하고 싶었고, 올바른 참선을 하기위해서는 올바른 참선을 지도해 주실 선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재주도를 떠나 육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비 등 돈이 문제였다. 더욱이 수륙만리 육지로 나가는데 조부님과 부모님, 그리고 아내 이씨와 작별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도리일 것도 같아 노자도 구할 겸 일단 집에 들르기로 했다.

 

이미 수도생활 1년여가 지난 경보청년은 집을 나설때의 상투를 튼 일반 속인이 아니라 머리를 삭발하고 먹물장삼을 걸친 완전한 승려였다. 머리를 빡빡 깍고 먹물장삼을 걸친 모습으로 조부님께 인사를 드리자 조부는 금세 눈이 물기가 어렸다.

이젠 네가 완전히 중이 되었구나. 그간 산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하며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부모님도 조부님 앞이라서 목을 놓아 통곡은 하지 않았으나 역시 울음섞인 목소리로,

예가 기어이 중이 되고 말았구나. 그것도 다 팔자소관일터이네 어찌하겠느냐. 아무쪼록 네 말과 같이 도사승이나 되어라

아내 이씨는 비록 남편이 중이 되어 나타났지만 다른 누구보다 반가웠을 터이지만 어른들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붉어진 얼굴에서 눈물만 찍어내고 있었다.

 

경보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애별리고(愛別離苦)를 생각했다.

그러나 애별리고가 늙어서 죽는 사별리고(死別離苦)보다 못지 아니함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아픈 이별이라고 느껴졌다. 옛말에,

죽어 이별은 남대로 당하는 것이지만 살아 이별은 젖은 나뭇가지에도 불이 붙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뼈져리게 느꼈다.

 

순간,출가자는 세속의 일에 사사로운 정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 채찍이 되어 자신을 휘감았다. 애써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경보스님은 어른들게 담담한 말씨로 이렇게 인사했다.

할아버님과 부모님잉 출가를 허락해 주시어 이렇게 중이 되고 보니 사무한신(事無閑身)이 되어 천공을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고 푸른 소나무 위에 깃들이는 학과 같고 물 위에 날아다니는 물새와 같사오니 너무 걱정은 마옵소서

 

할아버님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게 네 소원이니 네가 어찌 집에 붙어있겠느냐. 이왕 내친 걸음이니 열심히 수행하여 도사가 되어라

이토록 할아버님의 완전한 이해가 있으셨지만 하루도 묵지 않고 당장 돈얘기를 꺼낸다는 것이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머나먼 육지로 나가면 언제 다시 집에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부모님 집에서 2~3일 묵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승려가 된 몸이어서 부인의 방에는 들지 않고 조부와 같이 사랑방에서 기숙하기로 했다. 부인이 야속하게 여길 것으로도 생각되었으나 이것이 출가자의 도리다 싶었다.

 

< 부인을 최초의 불제자로 삼다 >

다음날 아침 부인과 대면한 경보스님은 삼국시대의 의상조사와 선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다.

이제무터 당신도 나를 남편이라 생각지말고 나를 스님으로 생각하고 내 신도가 되어주오

라고 부탁하고는 부처님과 야수다라에 대한 이야기며, 아난과 마동가에 관한 이야기, 마하가섭과 금강비구니 등 자신이 승려생활중에 읽은 <팔상록><능엄경>에 대한아야기를 들려주며 한글로 번역된 <팔상록> 한권을 부인에게 건네주며 내가 보고싶거든 이것을 읽어보라고 했다.

 

경보스님은 이어 부처님께서 태자시절에 앞으로 만승의 천자가 되어 왕위를 누리게 되고 온갖 부귀를 누릴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이런 부귀와 부모처자 모두를 다 버리고 불생불멸의 진리의 도를 깨치기 위해서 출가하여 설산(雪山)에서 헤아릴수 없는 고행을 하시며 오도성불(悟道成佛)하여 천하중생을 제도하시어 이 세상에 제일 높고 가장 큰 성인(聖人)이 되었다는 얘기도 들려준 후, 뭍으로 나가 더 훌륭한 스님을 만나 올바른 참선도 하고 교학도 익히기 위해 노자를 마련코자 잠시 들렸노라고 했다. 자신이 직접 조부님께 사실을 여쭙는 것이 도리이나 말씀드리기가 어려워 차마 말을 꺼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후한 노자를 주셨던 조부님 >

손자며느리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경보스님을 불렀다.

, 경보야, 네가 집에 온 까닭은 이미 전해들었다. 더 훌륭한 스님을 만나 배우기 위해 육지로 나갈 노자를 얻으러 온 모양인데 먼 길을 떠나면서 어찌 노자만 덜렁 들고 떠날수가 있겠느냐. 백방으로 주선해서 여기 백원을 준비했다. 이 돈은 긴요하게 쓰고 특히 건강에 특별히 유념하여라.”

이 대목을 일붕 큰스님은 이렇게 기억하고 계셨다.

 

조부님으로부터 백원이라는 거금을 받으니 눈물이 핑돌았었지요. 당시 백원이면 여간 큰돈이 아니었어요, 당시 소학교 선생의 월급이 20~30원 정도였거든요. 그리고 조부님은 평소 몸이 허약했던 손주의 건강에 대하여 무척이나 걱정하셨거든. 그때 조부님이 백원이란 거금을 마련해주신 것은 노자도 노자려니와 만일의 경우에 약값으로 쓰라고 주신것일게야.

그때, 그 돈을 받도 이번에 육지로 나가서 성공을 못하면 조부와 부모에게도 죄를 짓게 되고 부처님께도 죄를 지어서 양가득죄(兩家得罪)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났지. 나는 훌륭한 고승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집에 들르지 않기로 굳게 마음 먹었어

 

당시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길은 부산으로 가는 길, 목포로 가는 길, 여수로 가는 길 등 세 길이 있었는데 운항하는 배 모두가 목선이었다.

 

경보스님은 구례군에 있는 지리산 화엄사에 진진응(陳震應)라는 대강백(大講伯)의 큰스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여수행 목선에 몸을 실었다. 그때가 바로 계유년 1933년 음력 10월 초순의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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