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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3-13 19:17
[불교어록방] <법천대종사 법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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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오늘은 음력 215,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신 열반재일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해마다 이 날을 열반재일이라고 하여 법회를 열고 부처님의 열반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반절은 부처님 오신 날이나 출가절이나 성도절과는 좀 다른 기념일입니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의 제삿날이 아닙니까? 그러나 부처님에게는 생사라는게 없기 때문에 기일(忌日)이라고 하지 않고 열반재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기념일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왜 부처님의 탄신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부처님 가신 날이라고 하지 않고 열반재일이라고 하는가,그리고 우리불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얻고자하는 열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열반재일을 통해서 우리 불자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오늘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어떤 삶을 살고 가셨는지를 돌이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간략하게 표현할 때, 주로 팔상성도(八相成道)를 둡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중요한 사건별로 여덟단계를 나눈 부처님의 일대기가 바로 팔상성도라는 것은 여러불자님들오 익히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이 팔상성도에도 여럴 학설이 있습니다만 내용은 거의 엇비슷합니다. 이 팔상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해서 일부러 나타내시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는 강도솔상(降兜率相)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시기 직전에는 도솔천이라는 하늘나라의 보살이었습니다. 불자들 가운에는 부처님의 전생담을 단순한 설화로써만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자라면 윤회사상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부처님께서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의 수행을 마치시고 마지막 단계로 도솔천에 계시면서 그곳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시다가 마침내 사바세계의 중생제도의 큰 원을 세우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탁태상(託胎相)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과는 달리 스스로 태어나실때와 장소, 그리고 부모님들까지도 스스로 선택하셔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업력에 이끌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가정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사바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정으로 정반왕과 그 부인 마야부인을 부모로 선택하시고 마야부인의 태속에 드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출생상(出生相)으로,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시는 모습입니다. 태어나시자 좌우 사방으로 일곱발자국씩 걸으시고 하늘과 땅을 가르키시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자후를 토하셨다고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높고 존귀하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단지 석가모니부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즉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존재가 어떤신의 피조물이거나 누구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가 독립적이며,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네 번째는 출가상(出家相)입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온갖 집착을 떨쳐버리고 출가를 결행하시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타성에 젖어서 하루하루를 마치 흐르는 물처럼 별의미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죽음이 두렵고, 죽음이 두려우니까 죽지 않으려고 유한한 이 몸뚱이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지 않습니까? 곰 쓸개를 먹고, 뱀탕도 먹고 별짓을 다하지만 진시황도 구하지 못한 불로초인데 늙지않고 죽지않는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자필멸(생자필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지 위해서 출가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릴수 있는 용기, 누구에게나 이런 결단이 필요한데 이를 결행하지 못하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이라는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셨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항마상(降魔相)입니다. 마군(魔軍)을 항복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마군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잠재해 있는 욕망입니다. 부처님은 오랜 수행을 거쳐서 마침내 마지막으로 자기자신의 마음 가운데 도사린 온갖 욕망들을 항복받으시고, 스스로 마음을 통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셨던 것입니다. 수행은 이 상대하기 힘든 내부의 적과 싸워 이기는 훈련입니다. 부처님은 마침내 이 일에 성공하셨던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성도상(成道相)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속에 적을 항복 받고 마침애 아뇩다라삼약삼보리,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시고 부처님이 되신 과정입니다. 무상정등정각,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심으로써 이 세상의 온갖 사물의 이치를 손바닥속의 구슬을 들여다보듯 훤히 아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품었던 온갖 의문이 봄눈 녹듯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문제, 삶과 죽음, 참다운 삶의 방법, 이 세상의 시작과 끝 등 어느것하나 모르는 것이 없게 되셨던 것입니다.

 

일곱째는 전법륜상(轉法輪相)입니다.

세상의 온갖 이치를 깨달으시고 부처가 되셨지만 그러나 진리를 깨달으신 것만으로는 부처님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란 인도말로 붓다가 변해서 된 말입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할때는 단지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서의 붓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붓다란 칭호외에도 여래.응공 .정변지 .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라는 열두가지의 별호가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단지 깨달은 사람만이 아니라 부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스승이며, 어버이와 같이 존경받는 덕행을 갖춘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처럼 열두가지의 별호를 갖춘 대성자로 추앙받게 된 까닭은 단지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만 있지 않습니다. 바로 모든 중생을 위해서 큰 공헌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공헌은 다름아닌 전법륜입니다.

 

<전법륜>법바퀴를 굴리다는 뜻인데,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만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깨달음을 얻으신 후 열반에 드실때까지 45년간 널리 가르침을 펴심으르써 어둠속에서 헤매는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셨고, 열반에 드신 후에도 그 가르침에 의해 헤아릴수 없는 사람들이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아 생사를 해탈하고 편안한 삶을 사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셨다면 26백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 분을 부처님이라고 떠받들 필요가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여덟째는 열반상(涅槃相)입니다.

바로 오늘, 성도하신지 45, 80세 되시던 해 음력215일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 누우셔서 마지막 설법을 하시고 육신을 버리신 모습입니다.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임무를 마치시고 영원한 법신불로 돌아가신 과정입니다.

 

지금까지 열반재일을 맞이하여 부처님의 일생을 기리는 뜻에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부모님의 기일(忌日)을 맞아 고인의 생전의 행적을 회고하면서 그 유훈을 상기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는 일이라서 부득이 팔상성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말씀드렸는데, 대부분 이미 다 아시고 계시는 내용들일 것입니다.

 

이제 앞서 말씀드린대로 왜 이 날을 부처님 가신 날이라거나 부처님의 기일이라 하지 않고 열반재일이라고 하는지 알아봅시다. 그러자면 부득이 먼저 열반이란 단어가 무슨뜻인지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지않으면 안되는데 이 말처럼 많이 쓰면서도 그 뜻을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말도 드물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마셔보아야만 차고 더운지를 알 수 있듯이 열반도 스스로 열반에 도달해보아야만 그 맛을 제대로 알수 있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설법을 하는 저도 아직 열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설사 열반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이해는 한다고 할지라도 제가 이해하는 만큼 여러분에게 곧이곧대로 전달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이나 옛 스님들의 말씀에 의지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설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종합적으로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열반이란 범어로는 니르바나(nirvana), 파리어로는 닙바나(nibbana)인데 음역하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 뜻은 취멸(炊滅) 불어서 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어서 끄는 대상은 장작불이나 성냥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종종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하시곤 하셨는데, 바로 이 마음의 불꽃을 불어서 완전하게 꺼버린 상태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인 마하밧가에 보면 열반과 취멸과 어떤관련이 있는지 쉽게 알수 있습니다. 어느날, 부처님께서는 1천명의 수도승을 거느리고 가야산에 계셨는데, 그들 대부분은 전에는 상투를 틀고 불을 섬기던 카이사파(가섭존자)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상대로 이런 법문을 하셨습니다.

 

수도승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소,(중략) 무엇으로 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꽃으로 타고 있고, 노염의 불꽃으로 타고 있소. 태어남, 늙어죽음, 두려움, 헤매임의 불로 타고 있소. 태어남.늙어죽음.두려움.슬픔.괴로움.근심. 고민으로 타고 있다고 나는 가르치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온갖 불꽃으로 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어리석음에서 오는 마음의 불꽃입니다. 이 타오르는 불꽃을 완전히 없애버린 상태가 다름아닌 열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서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가장 안락한 경지에 이른 상태를 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열반은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신상태, 즉 마음에 온갖 번뇌가 소멸되고 오직 지혜와 즐거움만이 가득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해탈이요, 떠 달리 말하면 깨달음입니다.

대집경, “ 온갖 번뇌를 여의고 최상의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하였으므로 최상의 열반은 곧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열반재일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께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신 것은 보리수 아래서 마음을 조복받고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신 일, 즉 성도와 더불어서입니다. 성도시에 이미 대열반을 성취하셨는데 왜 육신을 버리신 날, 세속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돌아가신 날을 열반재일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열반을 단순히 깨달음이나, 해탈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더 적극적인 차원, 즉 진리의 본원, 생명의 근원으로 파악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열반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영원불멸, 생사를 뛰어넘은 것이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부활절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죽은지 사흘만에 되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절을 가장 큰 명절로 기념하고 있지 않습니까?기독교 신앙은 바로 부활사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부활은 곧 영원불멸,비록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데, 바로 이와같은 의미가 부처님의 열반인 대반열반, 대열반의 삼덕 가운데 하나인 법신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대열반의 삼덕(三德)은 법신(法身)과 반야(般若)와 해탈(解脫)이 구족한 것을 말합니다.

이 세가지의 덕이 갖추어지지 아니한 열반은 소승의 열반, 또는 벽지불의 열반으로 부처님의 입멸을 상징하는 대반열반과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이르시기를,

열반이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서 형상을 초월했으며, 이곳에 있는것도 아니요 저곳에 있는것도 아니어서 공간을 초월했으며,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영원이 존속하는 것도 아니어서 시간을 초월했으며, 한 가지도 아니요, 갖가지 것도 아니어서 분별을 초월한 존재다. 그러기에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문(聲聞)의 열반은 개별성과 동일성을 관찰하여 온갖 사물의 도리를 깨달았음을 이름이요, 벽지불의 열반은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온갖 대상의 무상. 무아. 무락.무정함을 보아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성문과 벽지불은 궁극의 경지가 아닌 것에 열반이란 생각을 일으킨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를 요약해서 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깨달음, 그들이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궁극적인 열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열반에 있어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열반이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반열반 즉 부처님의 열반이라야만 진정한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앞서 말씀드린 법신과 반야와 해탈의 삼덕을 구비한 깨달음입니다. 삼덕의 의미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반야는 선천적인 지혜의 안목, 해탈은 온갖 것에 걸림없는 대자유를 뜻합니다.

 

그리고 법신(法身)은 부처님의 삼신(三身)가운데 하나로 법계의 이치와 일치되는 부처님의 진짜 몸을 말합니다. 2500여년전 오늘 80세를 일기로 수명을 마치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법신불의 화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법신은 빛깔도 형상도 없는 부처님의 본체신(本體身)입니다.

비유룰 들어 어두운 밤거리를 휘황찬란하게 장식하는 네온싸인이 석가모니부처님니라면 형형색색의 전구에 불을 밝히는 전원, 그것이 법신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라는 화신은 태어나고 죽음이 있지만 그 근원인 법신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마치 네온싸인이 망가져도 전기자체가 없어지지 않는것처럼 법신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신은 생명의 근원이요, 영원불멸이며, 항상 존재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오늘을 열반재일이라고하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욱신은 수명이 다해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근원이 되는 법신은 육신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열반재일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통사람들처럼 수명이 다해서 죽음을 맞이한 날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법신으로 환원하신 날이요, 오고 감이 없이 이 우주에 충만한 법신으로 상주하신 날입니다.

 

불자여러분!

석가모니부처님은 2600여년 전에 육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천육백년 전 80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설하시다가 사라쌍수 아래서 유명을 달리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중생제도를 위해 일부러 몸을 나투신 화신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은사실은 이미 한량없는 세월전에 진리를 깨달으시고 부처가 되셨고, 법신으로 상주하시는 영원한 부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굳이 화신을 나투시어 8상을 나투어 보이셨습니다. 신통이 자재하시므로 이 세상에 얼마든지 오래오래 머무를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열반상을 보이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불유교경(佛遺敎經)에서 당부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오늘 설법을 마칠까 합니다.

<불유교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유교>라는 말은 마지막 훈계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임박해서 부모가 자식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과 같은 간절한 뜻이 이 경 가운데 들어 있는데, 경의 마지막 부분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란 모두 무상해서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니,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세상의 모양이 이와 같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서 일찍이 해탈을 구하고 지혜의 밝음으로 모든 어리석고 어두움을 제거하라. 세상이란 참으로 위태로워서 굳게 지키는 사람이 없다.내 지금 멸도함이 몹쓸 병을 없애는 것과 같구나. 이 몸뚱이는 반드시 버려야 할 물건이요, 죄악의 물건인데 몸이라고 거짓 이름을 붙여 생노병사의 큰 바다에 빠져있는 것이다. 어떤 지혜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를 없애준다면 이는 원적(怨賊)을 죽이는 것과 같은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우리 다같이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 언젠가는 버려야할 육신에 대한 종노릇을 청산하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구족한 대열반을 성취하여 영원한 삶을 삽시다.

성불하세요!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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