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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4 21:09
[불교어록방] 지장스님< 알기쉬운 불교교리>
 글쓴이 : 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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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상(無常)의 원리

붓다가 존재론으로써 연기를 설명하면서 또 하나 잘 사용한 용어가 무상(無常)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과 상반되는 말이다.

한때 우리나라 TV 연속극대사에 삶의 회의,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연거푸 사용하여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꼬마들의 입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디 뱉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이 무상(無常)이라는 용어는 말할 것도 없이 불교에서 배웠던 것이며,또 그런 사고방식을 불교로부터 받았음이 명백하거니와, 원래 이 무상이란 헛됨이나 실망과 같은 정서적인 내용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의 양상에 대해 전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주로 연기란 말이 쓰여지고 반대로 무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존재론이 설명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많든 적든 주체성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이 존재론이 각자의 인생관에 연결되고 실천과 관련이 지어지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정서성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붓다가 무상이라는 말로 존재론을 말했을 경우에는 대단히 이론적,이지적인 경향이 강했고 정서성이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무상이란 눈물을 글썽거리게 할 말고 아니었다. 한숨을 쉬고 자지러질 성질의 말도 아니었다. 여실히 바른 지혜를 가지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론이 각자의 주체속에 이끌려 들어와, 다소간이라도 정서성이 수반한다는 점에서 연기란 표현과는 전혀 그 뉘앙스를 달리하고 있다.

 

잡아함경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수루나여.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물질적 존재)은 항구적()이겠느냐, 아니면 무상(無常)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그것은 무상입니다.”

무룻 색()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고()이겠느냐, ()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그것은 고()입니다.”

이렇게 무상학 괴롭고 변화하는 색()을 내 것(我所)이다. (自我). 본질(我體)이다 말할수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럴수는 없나이다.”

이런 문답은 초기 경전의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먼저 연기의 존재론을 무상이라는 표현으로 제기함으로써 거기로부터 주체적으로 고(), 그리고 무아(無我)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것이라고 여겨진다.

 

6) ()란 무엇인가?

무상한 고()라고 선언함으로써 붓다는 저 보리수 밑에서 획득한 존재론을 자기가 출가할 때 걸머졌던 과제( 인생의 고)와 연결시켰다.

그 고()란 어떤것일까? 붓다가 과제로서 걸머지고 있었다는 란 대체 어떤것이었을까?

붓다는 제자들에게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치고 집에서 나와 사문(沙門)이 된 경위를 들려주었다.

 

얼른 보기에는 괴로움이 찾아볼 수 없는 부유하고 즐거운 생활이었던 나의 생활도, 우연한 기회에 지피는 바가 있어서 잘 사색해 보았더니, 사실은 노() () ()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두 어깨에 걸머진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 청춘의 긍지와 건강에 대한 자신과 생명의 교만이 단번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수는 없다.

문자 그대로 인생은 유한(有限)한 것이다. 이 사실에 생각이 미쳤을 때, 고타마는 몸서리칠 정도의 불안을 느낀 것이다.

 

이런 고()는 현대인의 언어로 말한다면 오히려 불안이라는 개념에 해당할 것이다. 예상되는 면할 길 없는 운명앞에 몸서리친다는 것, 그것은 불안인 것이다.

 

붓다는 그 불안과 정면에서 대결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쉬울 리가 없었다. 6년의 세월이 헛되이 흘러갔다. 그가 만나본 여러 수도인들의 학설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 서광이 비쳤다. 저 보리수 밑에서 결가부좌를 한 지 며칠만이 었을까. 동쪽하늘에 샛별이 반짝일 무렵, 붓다의 가슴에 새로운 존재론의 힌트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었으며, 그 내용은 연기(緣起)의 이론이었다. 일체의 존재는 그럴만한 조건이 있으므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조건이 소멸하게 될 때 그 존재는 소멸하게 된다는 것, 그가 깨달은 근본사상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불안()도 또한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니할수 없지 않은가경전에는 ()는 연생(緣生)이다’ ,‘()는 유연(有緣)이며, 무연(無緣)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무연(無緣)이란 무조건의뜻, 만일에 고가 무조건이요 절대적인 것이라면 어떤 노력도 그것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붓다는 이 세상에는 무엇하나도 무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 역시 유연(有緣)한 것으로 조건이 제거되면 소멸할 수 밖에 없다. 결코 무조건.무제약적인 것은 아니다. 조건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연생(緣生)’이다.

 

부처님은 고()의 진상을 간파함으로써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을 캐고, 그 조건을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다음 희들도 오라고 우리들을 손짓하고 중도’.‘팔정도를 제시했다.

 

7) 사고(四苦)와 팔고(八苦)

갈수록 세상은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과학이 발달하고 소득은 늘어나는데도 인생의 괴로움은 그칠 수 가 없는 모양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고()를 사고팔고(四苦八苦)로 설명하고 있다.

사고(四苦)란 생노병사로서 인간생존의 기본적 고를 말한다.

태어나는 것만하더라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이미 태어날 때 어머니의 낳는 괴로움과 기약없는 인생 행로에 던져지는 큰 괴로움을 알고 출발한다.

 

춘원(春園)은 그의 작품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작든 크든 형벌과 비슷하다. ,,,,남녀관계,직업,경제,도덕,법률, 이같은 온갖 구속에 얽매어 살아나간다는 것은 형무소의 생활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라고 짙은 회의와 갈등을 토로한 바 있거니와 산다는 것은 정말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석가는 우리 인간에게서 어떻게 하면 이 멍에를 벗길수 가 있을가하고 생각 끝에 마침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집착심(執着心=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자유로운 길이 열린다는 자각(自覺=깨달음)에 도달했던 것. 이 생..,사의 사고(四苦)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일생동안 붙어 따라다니는 온갖 육체적,정신적인 괴로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다음 팔고(八苦)란 이 사고(四苦)의 구조를 기능적으로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의 네가지로 분류한다. 먼저의 사고를 합하여 팔고라 한다.

 

애별리고(愛別離苦)란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으로서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도 하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대구(對句)가 되어있다.

원증회고(怨憎會苦)란 원망하고 미워하는 자와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고, 구부득고(求不得苦)는 바라는 것을 얻을수 없는 괴로움을 말하며,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인간의 심신(心身)이 되는 오음(五陰=五蘊)에서 생기는 고통을 말한다.

 

이 오온(五蘊)이란 색().(), (). (),()의 다섯가지 요소이다.

그러니까 오음성고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8) 무아(無我)의 진리

무상과 무아 이러한 사상 체계에 있어 이 무아(無我)는 우리 불교일들에게 있어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점이 많다.

무아란 망아(忘我)와 몰아(沒我)의 황홀한 상태도, 무념.무상의 경지도 아니다.

또한 나를 억제한다든지 나를 없애는것도 올바른 견해는 아니다. 본래 무아란 한 사상적 입장을 표시한 것이지,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은 결코 아니었다.

법구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 뿐이니

자기 밖의 무엇을 의지하리요.

자기가 참으로 조어(調御)되는 때

더 없는 의지처를 얻게 되리라.

 

악을 행해 스스로 더러워지며

악을 안해 스스로 청정하도다.

청정하고 안 함이 자기 탓이니

남을 청정히 할 길이란 없어라.

 

이들 운문을 보면 결코 자기를 죽여라, 자기를 포기하라,자기를 망각하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 인간형성을 위해 전 노력을 집중하라고 가르칠 뿐이었다.

어느 비구(케마)가 병석에 있을 때 다른 비구들이 문병와서 말했다.

내가 (나가 있다)고 한 것은 이 육체()()라는 뜻은 아니다. 또 이 감각()이나 의식()을 가리킨 것도 아니다. 또한 그것을 떠나서 따로 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것도 옳지않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의 통일체에 (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여기에서 우린느 무아의 참뜻이 이르는 유력한 발판을 발견할 수 있다.

붓다에 의해서 나()가 부정된 무아는 일상생활에서의 행위의 주체인 자기가 아니라, 당시의 사상계의 주류이던 자에게 대한 고정관념을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구들이여, (물질적 존재)은 무상이다. 무상이면 곧 고(). ()면 곧 무아다. 무아면 곧 이는 가 아니며, 이는 아()가 아니며, 이는 아체(我體)가 아니다. 이렇게 바른 지혜를 여실히 관찰하라

 

붓다는 이렇게 1)아소(我所) 2)() 3)아체(我體)를 부정하였다.

첫째의 아소라는 말은 아소유(我所有)를 줄인 것이라고 한다. (내것)은 무상의 존재론에서는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식이 되어 자기소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정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을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의 아는, 그 시대의 사상가 사이에 유포되고 있던 자아에 대한 사고방식을 부정한 것이다.

셋째로 이는 아체가 아니다로 함은 자아의 불변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부정이다. ‘란 불변의 본체.본성.본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영혼에 대한 생각도 육체가 없어진 뒤에도 영원히 존속하는 나의 본체라고 생각되거니와 붓다의 무상의 존재론에 있어서는 그런것도 인정될 까닭이 없다.

이와같이 붓다가 말한 무아의 주장은 그가 깨달은 존재론의 입장에 서서, 인간을 냉철하게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붓다의 사상적 입장을 밝힌 것이어서 붓다의 인간해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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