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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4 20:26
[인물포커스] 일붕 서경보대종사 전기<붕새의 꿈과 기적>
 글쓴이 : SBC불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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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 서경보 대종사 전기

<붕새의 꿈과 기적>

 

제 2장 삼장전인의 어머님 태몽

 

<어머님꿈에 옥구슬을 전해 받다>

어느 시인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피울음을 토해내야 했고,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어야 했다고 표현했다이처럼 국화꽃이 아픔과 고통의 상징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일붕 서경보 큰스님은 서기(瑞氣)와 상서(祥瑞)로움 속에서 피어난 고고한 한송이의 연꽃에 비유할 수 있겠다.

 

20세기 초,5월 어느날남제주군 중문면 도순리한라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도순리는 멀리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해안마을이지만 주민 대다수는 어업보다는 비옥한 농토에서 농사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다따사로운 봄기운이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봄아직 깊은밤에 한 아낙내는 잠결에 눈을 뜨고 기이한 꿈을 생각하며 혹시 태몽이 아닐까하며 혼자 낮을 붉혔다.

 

노란 색깔의 옷차림에 길반이 넘는 긴 지팡이를 짚은 백발 노승이 구름이 자욱하게 쌓인 한라산으로부터 미끄러지듯 날아 내려오더니 푸른 옥구슬을 꺼내어 여인에게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다.

부인이여이 구슬을 받으시오.”

부인은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그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시는 스님이시온데 이런 값진 보배를 저에게 주십니까?”하였더니

나는 한라산 백운사에 있는 중입니다그간 이 푸른 옥구슬을 전할데가 없더니 귀댁에 인연이 있어 전하게 되어 가지고 왔으니 더 이상 묻지 말고 이 옥구슬이나 받으시오” 하는 것이었다부인은 당황하여 물었다.

이처럼 진귀한 옥구슬을 아무 까닭도 없이 어찌 거져 받을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전세에 지은 인연에 따라 되는것인데 댓가가 무슨 댓가입니까부인이 받을만한 인연을 전생에서 지셨고나 또한 드릴만하니까 드리는 것이니 여러말씀 마시고 받기나 하십시오.”

부인은 두 손을 모아 노승이 건네주는 옥구슬을 고이 받았다받아 본 옥구슬에는 부인으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스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받았습니다마는 옥구슬에 새겨진 글자는 무슨뜻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 그것은 삼장전인(三藏傳印)이라는 네글자입니다.”

“ 그것은 무슨뜻입니까?”

머잖아 댁에서 아들을 낳으시면 그 아드님이 장차 삼장법사라는 이름을 지닌 큰 인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몇 번인가 입속으로 삼장법사라는 말을 되뇌이던 부인은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스님삼장법사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이 노승이 설명해 드려도 부인께서는 모르실것입니다장차 태어날 아드님이 크시면 저절로 알게 될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말고 그 옥구슬이나 고이 간직하옵소서” 하고 황색옷을 입은 노승은 삽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1459부인은 밀동자 같은 아들을 출산했다.

바로 갑인년 봄이었다갓 태어난 아기는 유난히 살갗이 희었으며 이목이 수려했다.

이천서씨 문중에서는 귀한 옥동자가 태어났다고 웃음꽃이 활짤 피었으며 큰스님의 아버님은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금줄을 꼬고 있었다.

 

3장 일붕 큰스님의 조부님과 부모님

 

<승리자는 역사의 주인공>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는 뜻으로 호모 사피엔스라고도 하지만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으로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부른다정치적 동물성을 지닌 인간이 정치적 동물성은 긍정적일때는 개개인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것이 부정적일때는 때로 비극을 가져온다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도 예외는 아니다.

“ 같은 우유를 마시고도 독사는 독을 뿜어내지만 젖소는 신선한 우유를 공급한다.”는 가르침이다.

식민지시대의 일본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가리켜서 파당성이 강한 민족이며그런 민족성은 우리 한국이 처한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파당성은 헤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했다자신들은 우등민족이라는 속이 들여다뵈는 억지 논리를 펴려는데서 비롯된 발상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제3공화국 이후아세아의 최열등 후진구겡서 세계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을 이룩한 사실만 보더라도또한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 교포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한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결코 열등민족이 아니다.

 

우리의 당파싸움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은 많은데 이를 모두 수용할 만한 자리가 없는데서 빚어진말하자면 운영의 묘를 제대로 찾지 못한데서 비롯된 모순일 것이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꼭 자의적(字義的)인 뜻만 있는 것은 아니하는 점을 독자들은 이해해야 하겠다다시말해서 정치적이란 꼭 정치적 위상에 국한된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예를 들어 여인이 아름답고 싶은 것이나남자가 사내다움을 갖추려는 것이나운동선수가 세계적인 기록을 수립하여 스타가 되고자 하는 것이나예술인이 뼈를 깍는 인고의 노력과 창자를 쥐어 뜬는 배고픔을 견디면서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후세에 길이 전할 불후의 명작을 남기려는 몸부림이 모두가 인간만이 누린 정치적 성향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치적 성향은 이처럼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자신의 발전과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고 크게는 그 가문과 국가,민족의 영예를 드높이게 되는것이라 하겠다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며 패배자는 그늘에 가려지게 마련이다물론 승자가 패배자보다 반드시 우월하다는 법은없다승자보다 월등히 똑똑하면서도 행운의 여신이 웃음을 거두어 가거나 자신이 잘못지은 인연에 의해 패자가 되기도 한다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정치적 패배자의 귀양지요은신처이기도 했다.

정파싸움 과정에서 최고 통치자의 눈에서 벗어났거나 당파싸움에서 급속도로 그 세력이 위축되면 덮어놓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오지로 유배당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따라서 패배자로 제주도에 귀양을 오게 된 사람은 다행히 또 다른 정변이나 정치적 변화에 의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한 그곳에 상민으로 전락하여그곳 원주민과 더불어 농사일이나 어업에 종사하면서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어업에 종사한 조부님 >

언제어떤 경로로 큰스님의 가문이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는 이 나라의 정계를 주름잡던 후예였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어업으로 생업을 이어갔었다고 전한다큰스님의 조부께서 익숙치 못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면서도 1년에도 수십번씩 풍랑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던 생활의 위험성과 험난함에 몸서리가 처졌던지 큰스님의 부친께서는 어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농업에 종사하게 하리라고 생각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미 배운 도둑질 같아 물일이 피할수 없는 생업이 되었지만 자식의 대까지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고 생각했던지 큰스님의 부친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농사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손자에게 한학을 익히게 한 조부님의 뜻 >

몰락한 양반의 후예에게 감히 글을 가라칠 용기있는 스승도 없었겠지만 우선 먹고는 살아가야 한다는 다급한 현실앞에 조부와 부친은 글을 깨우치지 못하셨고 오직 물일과 논밭일에 정성을 쏟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1919년 큰스님의 나이 여섯 살 때에 일어난 3.1민족운동에 자극받아 알아야 살아남을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조부와 부친은 어쩔수 없이 배우지 못했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늦게 얻은 손자 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생각에서 후세를 가르치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비록 몰락하여 물일과 논밭일에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검어지고 손발은 텄어도 옛 양반의 본질적인 꼿꼿한 자세와 정신마저 초라해지지는 아니했을 것 같다.

특히 큰스님의 조부는 비록 학문적으로 무식하기는 했지만 기개가 높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남다른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그렇기 때문에 생활이 남보다 풍족하지는 못했을망정 비굴하게 누구에게나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어려운 중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돕고 구제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러한 유교적 선비정신은 귀하게 얻은 손자인 경보당 큰스님이 적령기에 이르었을 때 신학문대신에 한학을 하도록 했던 점에서도 조부의 정신을 엿볼수 있겠다손자에게 공부는 시킬망정 결코 왜놈의 앞잡이는 만들지 않겠다는 정신이 강하게 살아 있었음을 일붕 큰스님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통해서도 능히 알수 있겠다.

 

다음은 큰스님께서 기술인에게 들려준 회고담의 내용이다.

내가 적령기가 되어 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조부님께서는 크게 역정을 내시며 나를 이렇게 꾸짖으셨던 생각이 납니다. ‘학교공부를 하면 왜놈의 종노릇밖에 할 것이 없는데 그놈들에게 종노릇하려고 돈을 쳐들여가며 공부를 한단 말이냐 안된다’ 하고 꾸짖으셨어요평소에도 엄하시지만 무척 인자하셨던 조부님께서 그처럼 크게 역정을 내시는 것을 나로서는 처음 본 일이고조부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유일하게 겪었던 역정이었어요.”

 

조부님의 선견지명>

그럼큰스님의 조부께서 사랑하는 손자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겠다는 것을 역정을 내면서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기로 하자.

큰스님의 조부께서 일본놈의 종노릇’ 이라는 말을 들먹이면서까지 큰스님의 진학을 반대한 진정한 의미는 이 시점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큰스님의 조부께서 손자이신 큰스님을 남달리 귀여워 해주셨던 점부모로부터 들은 후일담을 통하여 조부를 생각해볼 때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생각해도 조부님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조부님의 그런 선견지명이 없었던들 나는 세속인으로 살았을 것이며 오늘의 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합니다.”

큰스님은 밝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큰스님이 강조하시는 선견지명 말고도 큰스님의 조부께서는 운명적으로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될 큰스님께서 운명의 길을 가도록 도우셨다고 하겠다그것은 큰스님이 태어나신 날 큰스님의 조부께서 꾸신 기이한 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조부님의 꿈에 나타난 도사 >

그러니까 1914년 59일 꼭두새벽이었다그날 새벽조부님은 기이한 꿈으로 잠을 설쳐야 했다며느리가 몸 푸는 날이 오늘내일 하던터여서 하루라도 빨리 며느리가 몸을 풀어 손자를 보기를 간절히 바라던 조부님이 그날따라 새벽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노란 도포를 걸친 도사 한분이 흔적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근엄하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 오늘 너희집에 도사가 탄생할 것이니 각별히 사랑하며 키우도록 하라그가 장차 커서 도를 닦아 하늘 밑에 구름을 헤치고 날아다니며 천하를 주름잡고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도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도사는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참 신기한 꿈도 있구나’ 라고 생각한 조부는 그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쓸고 동네어귀까지 길을 말끔히 쓸었다무식하지만 순박했던 조부는 집안을 쓸고 동네 고삿을 쓰는 것으로 귀인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집안 어른의 축복속에 태어난 큰스님은 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조부는 손자를 품에 안고, “우리 도사우리 도사라고 손 안의 보석처럼 애지중지했다.

조부는 귀여운 손자를 장래 도사가 되게 하려면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큰스님의 나이 여섯 살에 이르자 동네 서숙에 보내어 한학을 익히게 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일붕 큰스님은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심사가 어지러울 때나 한적한 시간에 선시(禪詩)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것도 조부님께서 나에게 신학문을 시키지 않고 한학을 시켰던 덕이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어요.”

 

--------------------계속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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