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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29 23:10
[불교어록방] 지장스님< 알기쉬운 불교교리>
 글쓴이 : 지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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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의 본질


1)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한마디로 부처님께 깨달으신 진리와 그에서 발달하고 분파된 온갖 교리와 법문 및 종지(宗旨)를 통틀어 말하나.

붓다곧 부처님이란 깨달은 이라는 뜻으로서 불타(佛陀) 또는 불()이라고 약칭하며, 이 말은 처음에는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석가모니(석가모니 .Sakyamuni)에 대한 칭호로써 쓰였으나 뒤에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일컫게도 되었다.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인간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을 무력한 존재에 놓고 절대적 존재에 대한 절대의존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불교는 전혀 그것들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붓다만 하더라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전혀 그 개념이 다르다.

그것은,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라, 또 최고의 유일한 존재로서 절대적 존재의 특수명사가 아니라 보편적인 보통명사이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또 깨달으나 깨닫지 못하나 부처의 성품들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깨달은 내용은 무엇인가 ? <마음의 법칙>이다.

 

불교의 실천, 윤리인 중도(中道). 그 기본적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기본적 체계는 사제(四諦)로서 이야기한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씩 하나씩 이에 접근해 설명해 가기로 하자.

 

2)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부처님은 신()이 아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신격화(神格化)하기를 거부한다.

상응부경전의 밧카리라는 경에 보면 병든 비구 밧카리가 주인공이 된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붓다의 모습을 뵙는 일이 소원이었다. 붓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밧카리를 찾았다.

대덕이시여, 이제 마지막 소원은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뵙고, 두발에 정례(최대의 경례)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박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한다. ()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나니 마땅히 이렇게 알라

병든 제자의 머리맡에 앉은 붓다의 마음은 동고동비(同苦同悲)의 생각으로 가득차 측은한 마음 누를길 없었다.

 

그러나 박카리를 놀라게 하고 동석한 비구들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죽어가는 비구에게 자기를 예배하고자 하는 청을 거부하고, “ 너는 나를 보려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설한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있어 가르침과 행동의 수범을 보여서 인도자가 되어 선두에 서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불교라 해도 교조(敎祖)를 중심으로 한 종교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와 같이 신의 아들도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도 아니고 속죄자나 심판자도 아니다. 기독교에서와 같이 예수가 중심관념을 이루로 그에 관해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는 성립될수 없는 입장과는 다르다.

 

불교의 교조인 <붓다>에 대한 신앙고백은 있다. 바로 삼귀의(三歸依)가 그것이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달마님께 귀의합니다.

승가(僧伽. 교단)님께 귀의합니다

이 삼귀의에서 부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첫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가 법을 알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니까, 그 지혜와 인격에 마음으로부터 신뢰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뜻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붓다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이런 표현이 자주 경전 속에 나타난다.

붓다에 대해 무너짐이 없는 믿음을 지니노라. 세존께서는 응공(應供).정등각자(正等覺者).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 (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타(佛陀). 세존(世尊)이시다

 

여기에 열거한 어마어마한 열 개의 이름은 예부터 붓다의 십호(十號)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니와, 그것들을 설명하면 세상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응공). 샅샅잉 깨달은 사람(정등각자).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명행족). 다시는 윤회를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선서). 이 세상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세간해). 모든 중생의 스승인 사람(천인사). 가장 높은 사람(무상사). 마음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사람(조어장부). 진리를 깨들은 사람(세존)이란 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인간임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신적(神的)인 존재로서 인식하지 않았다.

 

불교는 인간이 자기 형성의 길이다. 신의 은총으로 천국에 가는 길도 아니며, 더더욱 많은 복을 받겠다든지, 역량 이상의 영광을 얻겠다든지 하는 것일수는 없다. 오직 한가지 잘 조어(調御)된 자기를 확립함으로써, 거기에 궁극의 자유와 안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험한 길이다. 신의 은총 없이 오직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그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라고는, 다만 부처님의 수범과 그 가르침과, 그리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법의 형제들과 맺어지는 우정의 손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세가지 귀의처, 즉 불,, 승 삼보 그것이다.

기독교가 철저한 신의 종교라면 불교는 철두철미한 인간의 종교라고 할수 있다.

3) 석가부처님의 깨달음

고타마 붓다 라고 불려지는 석가는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서 아무런 부자유도 없는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로맨티스티이다. 철이 들면서부터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자 어떻게든지 자기자신이 해결해 보려고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의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3)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고타마 붓다라고 불려지는 석가는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서 아무런 부자유도 없는 생활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로맨티스트이다. 철이 들면서부터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자 어떻게든지 자기자신이 해결해 보려고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의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때로는 하루 한알의 참깨와 한알의 쌀만으로 단식수행을 하여 뼈와 가죽만이 앙상했던 일도 있었으나 이런 수행에 굽히지는 않았다.

 

어느날 네란쟈야 강에서 목욕을 하고 마을 처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으로 체력을 회복하여 근처에 있는 가야마을 의 보리수 아래에서 정관(靜觀)하다가 마침내 128일 미명에 깨달았다. 깨달음이라고 해서 신의 힘을 빌려서 신통력을 얻거나 신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참다운 자기와 주위의 존재법칙을 깨달았던 것이다.

 

부처님이란 깨달은 사람을 일컬은 존칭으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는가?

<우리에게는 본래 나()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에 집착되어 모든 것이 불변한 것이라고 착각을 일으킨 마음이 우리들을 괴롭혔다>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집(我執)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깨달았다. 이런 개체(個體)의 자각을, 존재의 법칙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자기만 알고 있을것인가 남에게도 전해야 할것인가 하고 주저했다.

그때 범천(梵天)이 나타나서 거듭 말하기를 전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 간청에 의해서 붓다가 된 석가는 가까이에 있는 사라나트에서 처음으로 다섯제자에게 설법했던 것이다.

 

4) 연기(緣起)의 법칙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오랜 탐구 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들음으로 해서 붓다로 불리게 되었고, 이것을 원천으로 하여 불교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내용이 흘러나온것인데, 이 깨달음의 내용이란 단적으로 어떤것인가 그것은 연기(緣起)라는 술어로 그 뒤에 붙여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던 부처가 깨달은 법은 이 연기의 도리였다.

 

연기란 말미암는다는 것과 일어난다는 말의 복합된 단어인데 중국사람들이 번역할 때 연기(緣起)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세상의 일체의 존재는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성립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

비구들이여, 연기란 어떤것인가? 이를테면 생()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정해져 있는 일이다. 법으로서 정해지고 확립되어 있는 일이다. 그 내용은 상의성(相依性)이다. 그것을 나는 깨달았다. 깨닫고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노니 너회들도 보라말씀하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된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제자 사리풋타와 어느 외도와의 문답에서 갈대가 서로 기대어 의지하고 있을 때 비로소 서 있을수 있다는 유명한 갈대의 비유로서 연기의 이치를 설명한 바 있거니와, 두 개의 갈대의 단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지탱할 수 있는 상대성의 원리이다.

 

붓다는 이 원리위에 불교라고 일컬어지는 사상과 실천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무상(無常)의 원리가 그 위에 세워지고, 무아(無我)의 도리가 그것을 근거로하여 주장되었다.

그뿐 아니라 중도(中道)의 사상도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실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만유의 진상이란 것은, 일체의 존재는 어느것이나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기는 것, ‘말미암아 생긴 것이었다. 조건없이 존재하는 것, 제약받음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하나도 있을 수 없으며,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근본사상이다.


<계속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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