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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17 20:29
[불교어록방] <법천스님 법어>성불에 이르는 길 ( 信.解.行.證)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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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법회에서는 불교의 목적과 대의란 주제로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목적은 모든 중생의 성불에 있으며 따라서 불교신앙,또는 불교수행의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성불에 있고,불교의 대의란 성불에 이르는 방법인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것으로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은 하지 않으며,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칠불통게로 이를 대변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불자의 궁극적 목표인 성불을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우리는 성불이란 말을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실현불가능한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따라서 내가 어찌 감히 성불을 바라겠는가?” 하는 열등감을 갖지 말고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성불이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성불에 이르는 길이라는 전제하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며,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칠불통게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유치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이 게송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므로 실제로 수행을 통해 성불코저 하는데는 좀 더 친절한 안내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즉 선악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것도 문제고,마음을 깨끗하게 갖는것도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되는가 생각해야 하는데,오늘은 이에 대해 교()와 선()의 두 측면 가운데서 교학적인 측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학적인 측면에서 살피면 성불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증이라는 네 단계의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란 믿음이요, ()는 이해, ()은 실천이며 증()은 깨달음의 증득, 곧 성불을 뜻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산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등반을 시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성불산(成佛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성불산의 봉우리에 오르려고 한다면 첫째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엇보다고 먼저 반드시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는 신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해마다 히말라야의 영봉을 향해 수없이 많은 등반가들이 도전을 하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정상정복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등반대열에 낄 수 있는것입니다.나는 안된다든지, 거의 가망 없는 일이라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등반대원에 참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설사 확신없이 참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도중에서 역경을 만나면 정상정복에 실패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 올 확률이 높습니다.그러나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비록 도중에서 생명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정상정복의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등반에 대한 서전지식이 필요하겠지요? 등반에 필요한 제반 조건 이를테면 산세.높이.기후 등 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리에 대한 지식,고지대에 대한 적응방법 등 제반사항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또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즉 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등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자기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정상정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음은 등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그 준비물을 완전히 갖춘 다음에는 실제로 등반에 나서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믿고 이해한 것들이 정상정복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과 정력의 낭비만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정상정복은 이와같이 믿음과 지식과 준비,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이처럼 믿음과 이해와 실천을 통해 정상에 오를 수 있듯,성불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불에 대한 확신과 이해,그리고 수행이라는 실천이 따라야만 마침내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를 일컬어 한자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합니다.

 

성불에 이르는 첫 단계는 믿은 신()입니다.

()이란 확신입니다.그러나 이 믿음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거나 죽어서 천국에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요,이는 곧 성불할 수 있다는네 대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또 성불에 도달할 수 있는 믿음은 첫째는 자기자신 가운데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이 존재한다는데 대한 믿음이요,둘째는 노력하면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불자들이 빈번하게 인용하는 문구 가운데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믿음은 도의 원천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으로 구역화엄경 현수보살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문구만을 독립적으로 생각할 때 믿음을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친구사이에 이 말이 쓰이면 이 경우,믿음은 우정을 말하게 되고,사업에 쓰이는 경우는 사업이득을 의미하게 됩니다.그러나 화엄경에 나오는 신위공독모의 신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요,이는 성불에 대한 믿음입니다.

 

()은 도에 들어가는 제1보인 까닭에 보삭계위 52위 중에서 십신위(十信位)가 제일 처음에 있고,지도론에는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능히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능히 건널 수 있다하였습니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 보리심을 발하고 구도행각을 벌리는데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말을 듣고 이를 믿음으로써 비로소 도의 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그러므로 신은 바로 보리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앞서 말한 불성의 존제를 믿고 성불을 믿는 믿음인 까닭에 진정으로 믿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까?

 

한번 냉정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 반은 믿어지고 반은 의심이 가리라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긴가민가한 얄팍한 믿음으로는 성불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불이란 우연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소가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식으로 되는일이 아니라 온갖 인욕과 보시와 선행과 정진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힘든 일을 처음부터 의심한다면 중도에서 난관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돌파할 수 있겠습니까?

 

불성의 존재,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이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법화경 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한 거부장자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어려서 아들을 잃어버리고 집 나간 아들만을 생각하면서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한편 어려서 집을 뛰쳐나간 아들은 오랜 세월 방랑하면서 아주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거지가 된 아들은 어느날 우연히 거부장자의 대저택을 기웃거리게 되는데 그 집은 바로 자기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아들은 너무 화려해서 높은 권세가의 집이거니 생각하고,잘못하다가는 붙들려 혼이나 나지 않을까 싶어 돌아서려고 했습니다.

 

한편 장자는 오랜 세우러이 흘렀지만 그가 자기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으므로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데려오도록 했습니다.하인에게 붙들려 온 아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장자는 그런 몰골을 한 아들에게 자기가 아버지라고 해봐야 믿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방편을 생각해냈습니다.

 

그 집에 하인으로 고용하여 일자리를 주고,거름치우는 일을 시키고 후한 대우를 하기로 했습니다.차츰 일에 익숙해지고 장자와도 가까워지자 차례로 더 나은 일을 시켰습니다.그러는 동안 아들은 아버지와 친근해졌습니다.마침내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를 맡기는 단계에 이르자 장자는 그때서야 아들에게 자기가 친아버지임을 말하고 그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고 편안히 눈은 감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장자는 부처님,집을 나갔다가 돌아 온 아들은 바로 우리네,범부들입니다.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너희들도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 않으시고 성문.연각.보살의 길을 가르치다가 마침내 중생들의 근기가 성숙해지자 비로소 일승법문(一乘法門)을 설하시게 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승이란 한수레란 뜻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오직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는 한가지 수레에 타게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의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승법문은 모든 가르침을 베푸시고 난 연후에 중생들의 근기가 성숙해진 다음에 설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사람들에게는 잘 믿어지지 않는 법문입니다.그러나 이 믿음이 없이는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확신해야만 합니다.내자신 가운데 불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나도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 이 믿음이 없으면 복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귀영화는 누릴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한 성불의 길은 기약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성불이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성불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내 자신 가운데 불성이라는 보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꺼내는 방법을 모르고는 보석의 진가를 알 수 없듯 믿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불에 이르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그것이 바로 믿음 다음의 해(),해는 성불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을 뜻합니다.올바른 성불의 길,이에 대한 이해는 바로 신() 다음의 해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은 성불은 고사하고 큰 피해를 가져오게 됩니다.일부 사이비 불교도들 사이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미륵신앙도 교리 자체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한데서 온 것입니다.

 

또 일부 불자들 가운데,특히 참선만이 성불의 유일한 길이라는 편견을 가진 분들 가운데는 불교를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알음알이만 키우는 짓으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이런 주장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학문적 소양인 해()가 부족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염불이나 기도나 참선이나 어느것 한가지만 열심히 하면 성불할 수 있으므로 교리를 이해하는 데 정력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된 편견입니다.

 

온갖 법은 한량이 없으니 학문을 쌓아야 비로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빗방울이 떨어져 시원스레 흐르는 물이 되는 것은 점점 모였기 때문이니,비롯함 없는 윤회의 바다에서 보리심을 일으켜 금강도장(金剛道場)에 앉아 불과(佛果)를 성취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제법집요경(諸法集要經)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와 앞서 말한 은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의미의 불자가 아닙니다,왜냐하면 교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만 강하게 되면 광신자나 사교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불법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믿음은 없고 오직 학문적인 지식만 풍부하고 보면 불교학에 대해서 박사학위는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불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교리공부도 하고 경전도 많이 읽어서 바른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모르고는 바르게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알고 믿어야 합니다. 최소한 사제법이 무엇인지,팔정도가 무엇인지,육바라밀이 무엇인지,윤회,인과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은 공부를 통해 이해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불자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이해하는 수도 있고,먼저 이해한 다음에 믿음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어느 경우건 한쪽만으로는 진정한 불자라 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신과 해.

이 두가지는 성불을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합니다.이제 준비가 완료되었다면 그 다음은 실천해야 합니다.이것이 바로 행()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죄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아무리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J.P 사르트르는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자기자신을 만든다고 했고, T.H헉슬리는 인생의 위대한 종말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들은 사상이나 지식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식이나 사상이 사람에게 유익하게 되려면 그에 걸맞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아는것도 중요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과 이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가 된다는 확신이 있고,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성불이라는 목적지는 항상 상상속에만 머물고 자기자신에게는 그림속의 떡에 불과한 것입니다.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문(多聞)하다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무식한 것과 같으니,먹는 이야기를 아무리하여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또 화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여래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없으니,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스스로는 굶주려 먹지 못하는 것 같으며,남의 약은 잘 지어주면서도 제 병은 못고치는 것 같으며,남의 보물은 세면서도 자신에게는 반 푼의 소득도 없는 것 같으며, 왕궁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추위를 당하는 것 같으며,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해서 남을 기쁘게 하지만 자신은 못듣는 것 같으며, 소경이 여러 형상을 그려 남에게 보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과 같다.

가르침을 닦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이와 같을 수 밖에 없다.”

 

실천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 믿음은 강한데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지,신심과 학식은 갖추었는데 행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은 육바라밀입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십선을 행하고 사무량심을 발휘하는 일 이런 일들이 곧 성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실천행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증()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증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입니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불성을 깨닫는 것입니다.불성을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되는 과정이 증()의 과정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간추리면 불교신앙의 목적인 성불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불성의 존재와 성불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고 ,다음에는 성불에 대한 길 안내와 같은 불교 교리에 대해 배워야하고, 다음으로는 이 배움을 행동을 통해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성불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 순치황제의 출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백년세사(百年世事)는 삼경몽(三更夢)이요,

만리산하(萬里山河)는 일국기(一局棋)로다.

백년의 세상일은 하루밤의 꿈속이요,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의 바둑노름일세.

 

우리가 울고 불고 집착하는 온갖 세상사는 하루살이의 꿈과 진배가 없는 것입니다. 이 허무한 인생을 뜻 깊게 사는 길은 우리 자신 가운데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불성을 발견하고 성불하는 길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믿음과 학문과 수행의 삼박자를 갖추어 기필코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성불하세요!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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