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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2-09 22:45
[인물포커스] <동안거와 올바른 기도>
 글쓴이 : 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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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와 올바른 기도>

 

오늘은 동안거의 의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백일 기도의 의의와 올바른 기도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음력 1015일은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안거라는 말이 신도님들에게는 생소한 말일 수 있겠으나 스님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비록 산중 처소가 아닌 도시의 사찰에 거주하는 스님들이라도 이 날은 출가한 근본 뜻을 되새겨 보게 되고,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안거(安倨)라는 말은 우기(雨期)라는 뜻을 가진 인도말인 바르사(varsa) 또는 바르시카(varsika)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인도의 장마기 3개월간에 실시되는 불교승단의 특수한 연례행사를 안거라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실시된 제도로 스님들은 이 안거기간, 416일부터 715일에 이르는 90일 동안은 일정한 처소에 머물러서 오로지 연구 정진 수양에 힘썼습니다.

 

본래 부처님 당시의 스님들은 지금의 스님들처럼 일정한 처소를 정해 기거하면서 수도하고 포교를 한 것이 아니라, 거처없이 돌아다니면서 나무 밑이나 동굴 같은데서 잠자고 음식은 걸식을 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은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불편하고, 또 우기에는 벌레를 비롯한 작은 생물들의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돌아다니다가 벌레를 밟아 죽여 본의 아니게 살생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정착, 오로지 수행에만 힘썼던 것입니다.

 

이 안거기간에 스님들은 절이나 작은 집, 또는 바위굴 같은데서 한사람, 또는 두사람 이상이 모여서 안거를 행했고, 식사는 재가신자가 때에 맞춰 제공하고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것을 일과로 했던 것입니다.안거의 첫날은 안거의 제도를 맺는다는 뜻으로 결제라하고 안거를 끝마치는 것을 해제라고 합니다.

 

안거를 마친뒤에는 안거기간 중에 스스로 죄를 범한 일이 있고 없고를 서로 묻는 작법이 행해졌는데,이를 자자(自恣)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수의(隨意)라고도 합니다.

 

이 안거의 행사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다음해부터 입멸하실 때까지 계속 되었고,그 뒤에도 불교가 전승된 모든 지역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참선,불교연구,정진,수양의 행사로써 겨울과 여름, 한 해에 두차례 행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안거 행사가 많이 변질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이 부처님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겠습니다. 현재는 이 제도가 여법하게 시행되는 사찰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총림을 비롯하여 제방의 선원이나 강원에서는 안거제도가 여법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찰은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시대상황이 부처님 당시와 달라졌다는 것은, 부처님 당시는 스님들의 의식주 문제를 신도들의 시주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안거기간 중에 오직 정진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스님들이 직접 사찰의 재정문제를 감당해야 하고 행정적, 사회적 제반문제를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안거기간이라고 해서 방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을 계승하고 안거기간을 보다 더 뜻있게 보내자고 하는 취지에서 안거를 실시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절에서는 이 기간 동안에 백일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안거기간에 스님들만 수행정진 하는 것 보다는 신도님들이 함께 참여해서 기도 정진하는 것이 더 뜻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절에서도 안거의 의의를 살리고 겨울 한 철 동안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고자 백일기도를 봉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안거의 유래와 그 뜻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였으이라 믿고, 백일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일이라는 것에 대해선느 종교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안거기간이 구십일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기도를 하려고 하다보니까 90일보다는 백일동안 하는 것이 더 정성스러운 것이 아닌가 해서 백일로 잡은 것 뿐입니다.

 

하지만 예부터 백일은 큰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 기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석달 하고도 열흘 동안 정성을 들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네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어떤 자세로 기도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절에 오셔서 기도하실 때나, 집에서 염주를 굴리면서 기도하실 때 어떤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까?

 

집안이 편안하게 해주십사하고 기도하셨습니까? 남편이 하는 사업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니면 성불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또 기도에 동참할 때 어떤 방법으로 하셨습니까? 기도는 스님이 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참만 하고 있다가 회향할 때만 참석하셨습니까? 아니면 집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셨습니까?

 

제가 그동안 우리 신도님들의 기도하는 태도를 관찰하면서 느낀 점은, 기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불자의 기도와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기도,다른 종교인들의 기도는 엄밀히 말하면 전혀 그 뜻이 다릅니다. 대부분 이를 혼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사전을 보면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행동의 중요한 형식으로써 신자가 신앙의 대상에 대하여 말이나 문서로 교섭하는 것으로 주로 가호(加護)를 빔. 원시적으로는 대상이나 내용에 관하여 별로 한정이 없고, 종교적 경험이 겉으로 드러나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과 같은것이라 했고 또 그 뜻을 종교적으로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 : 불보살에게 이레나 스무이레나 백 날이나 또는 천 날의 기한을 정하고

        정성을 들여 빔

*천주교 : 마음을 드려 천주께 향함.천주를 흠숭사례(欽崇謝禮)하여 자신이나 딴 사람에게

         필요한 각종 은혜를 구함.묵상기도와 염경(念經)기도의 두가지가 있음.

*기독교 : 하나님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와 찬미와 희구를 드려 비는 일.

          묵상기도와 통성(通聲)기도가 있음

*천도교 : 수도 방법의 한가지 심고(心告),송주(誦呪),묵념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처럼 사전을 통해서 보더라도 각 종교마다 기도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른 종교인들은 기도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불교는 불보살님에게 날짜를 정해 정성들여 빈다고 하는 막연한 표현을 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해설이 없습니다.

 

불교의 기도는 기원(祈願), 기념(祈念), 기청(祈請), 심원(心願)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도움을 힘입어 화()를 덜고, ()을 더할 것을 비는 종교심을 말합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재액을 없애고 병을 낫게 하는 등의 목적으로 신에게 기도했는데, 부처님 초기에는 인과의 도리만을 말씀하시고 기도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에는 기도를 통해 재액을 덜 수가 있다고 설하셨고,후세에 와서는 밀교(密敎)가 성행하여 천차만별의 기도가 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 기도를 부정하신 것은 기도로 인해 소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인과를 철저히 믿음으로써 스스로 지어서 받는 인과법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자력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력 신앙이 병존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기도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신앙 형태가 밀교입니다. 우리 한국 불교는 선과 교(禪敎)를 뿌리로 하는 현교(顯敎)지만 밀교사상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은 밀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전입니다.

 

지금 우리 불자들이 하는 기도는 이 밀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밀교에서 행하는 본래의 기도법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올바른 기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기도를 수법(修法) 또는 행법,밀법이라고 하는데, 밀교의 특징은 그 의식이 아주 장엄하고 엄격하다는 것입니다.우리처럼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때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도 목적에 적합한 단을 쌓고, 불보살을 모신 후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고 호마(護摩)를 행한 후에 기도를 합니다. 또한, 우리처럼 단지 합장하고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는 인()을 맺고 마음속으로는 본존(단에 모신 불보살)을 염함으로 기도하는 행자와 본존과의 삼밀(三密), 즉 몸과 말과 뜻이 일치되오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 기도방법으로는 다섯 또는 네가지를 들수 있으나 요약하면 식재법(息災法),증익법(增益法),항복법(降伏法)의 세종류가 있습니다. 재해나 고난을 없애기 위해서는 식재법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증익법을, 악한 사람 또는 악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항복법을 행합니다.

 

이 밖에도 경애법(敬愛法), 구소법(鉤召法) 등이 있는데, 이들 기도법 가운데는 세속적인 작은 소원에서부터 불교의 궁극적인 높은 서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밀교의 기도법은 엄격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이를 위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단의 모양이라든지 앉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진 규정이 있어서 결코 혼동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밀교의 기도법은 까다롭기 때문에 그대로 행하기는 어려운 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밀교에 속하는 종단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현교에 속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이같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도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기도는 밀교의 행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그 근본 뜻만은 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밀교에서 행하는 기도의 근본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밀교의 행자(기도자)는 그와 같은 의식을 통해 본존, 즉 기도대상이 되는 불보살님과 몸과 말과 뜻이 하나가 되도록 온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불보살님과 신..의가 하나가 되었을 때, 즉 삼밀이 일치할 때를 기도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 소원이 어떤것이든, 작은 가정사에서부터 성불하고자하는 큰 서원에 이르기까지 그 기도의 성취는 본존과 몸과 입과 뜻이 일치될 때, 비로소 그 소원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이 기도는 스님이 하고 여러분은 기도 동참금이나 내고 가끔 절에 와서 정근을 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정신을 가지고 기도를 하니까 기도가 성취되지 않는것입니다. 그 소원이 무엇이든 불보살님과 하나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불보살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말과 뜻과 행동이 불보살님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와 같이 되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최소한 기도하는 백일 동안은 말과 뜻과 행동을 부처님과 같이,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앞에서 기도의 일반적인 뜻과 종교의 기도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렸는데, 불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기도하는 방법, 기도하는 목적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는 기도를 통해 그들의 신과 똑같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결코 신이 되는 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기독교인을 본 일이 있습니까? 천주님이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신부에 대해 들어 보신 일이 있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어느 목사나 신부가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이나 천주님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곧 이단자라고 해서 교회나 성당에서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그 분들은 기도를 통해서 오직 신의 은총을 기대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그 은총이 자신에게 내리든지 아니면 다른사람 또는 국가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온 인류에게 내리든지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이 결코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또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교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자질구레한 세속적인 소원도 기도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가장 차원 높은 목적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신앙목적,기도목적과는 그 근본부터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조물주가 만들어 낸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완구공장에서 만들어 낸 장난감처럼 말하고 웃는 그런 인형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스스로 독립된 존재, 가장 고귀한 생명체들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떠다가 이 모양 이꼴로 타락해서 작은 일에도 성내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양보할 줄 모르는 편협한 인간으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범부중생으로 살고 있지만 결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 가운데 무궁무진한 능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 부처님이나 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자신 가운데 간직된 지혜와 능력을 개발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습니다. 바랄것이 없는데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 자신의 무한 능력을 개발하는 일, 성불에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처도 아니요, 신도 아니기 때문에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르게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고통받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깨달으라고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온갖 고통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정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데서 오는 욕구불만의 표출입니다. 부처님을 자신을 위해 바라는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모든 소원들은 알고 보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내부에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네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밖에 계시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는 말을 하면 부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망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쓰이지만 누구든지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기 때문에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너도 나도 자신 가운데 부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이 자신 가운데 있는 부처와 우주에 편만하신 부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입니다. 기도의 성취는 바로 내 안에 부처와 우주에 가득한 부처님과 서로 만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냇물이 아래로 흐르면 마침내는 바다로 흘러들어 바닷물이 되듯이 우리의 정성이 부처님을 향해 계속 나아가면 마침내 부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부처바다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우리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음기도를 하면 우리 스스로 관음보살이 되어야 하고, 지장기도를 하면 우리 스스로 지장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전무결하게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보살 노릇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 지장보살해서는 안됩니다.

 

세가지, 즉 말과 뜻과 행동이 보살다워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자비스러운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처럼 지혜롭고 자비스러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식을 대할때나 남편, 아내를 대할 때, 직장에서 상사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 이웃을 대할 때, 이 모든 때와 장소에서 관세음보살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누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줄 몰라서 안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100퍼센트 관세음보살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80퍼센트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50퍼센트만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여러분의 소원은 거의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단지 불보살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불보살님과 닮아갈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다 같이 명심합시다.

부디, 백일 기도 동안 우리 신도님들 가운데서 많은 관세음보살님이 나오셔서 이 법당이 관세음보살로 가득차기를 기원합니다.


불교설법연구원편

법 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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