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이
점지한 복지, 등명낙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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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명 : 등명낙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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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파 : 대한불교조계종 |
○ 창건시기 : 신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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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자 : 자 장 |
○ 전화번호 : 033-644-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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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
○ 성보문화재 : 8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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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당시 강릉 지역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던
곳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힘으로 이를 막기 위하여 부처의 사리를 석탑 3기에
모시고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수다사(水多寺)라 하였다. 석탑
3기 중 1기는 현존하는 오층석탑이고 1기는 1950년 6·25전쟁 때 없어졌으며
나머지 1기는 절 앞바다 속에 수중탑(水中塔)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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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고려 초에 중창하고 절 이름을 등명사(燈明寺)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있었고 절의 위치가 어두운
방 가운데 있는 등불과 같은 곳이라 하여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삼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빨리 급제한다고
해서 붙였다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매우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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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된
이유로는 3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다는 설이며, 둘째와 셋째는 왕실에서 폐사시켰다는 설이다. 왕실에서 폐사시킨
이유 중 하나는 안질에 고생하던 어느 왕이 한 점술가의 말을 믿고 폐사시켰다고
한다. 그 점술가는 왕의 병이 정동쪽에 있는 큰 절에서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들어가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왕의 특사가 함경남도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이곳에 와 보니 점술가의 말과 같았으므로 폐사시켰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절이 서울의 정동쪽에 있어 궁중에서 받아야 할 일출을
늘 먼저 받으므로, 정동쪽 등불을 끄면 조선에서 불교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주장에 따라 폐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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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56년 경덕(景德)이 중창한 뒤 관세음보살이 늘 머무는
곳이라 해서 절 이름을 낙가사로 바꾸고, 옛 이름 등명을 앞에 붙여 등명낙가사라고도
부르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는 주법당인 영산전을 세웠고, 1982년부터 청우(淸宇)가
범종각과 삼성각·극락전·약사전·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영산전과 극락전·약사전·범종각 등이 있다. 이 중 영산전은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어 오백나한전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여기에 모셔진 오백나한은 인간문화재 유근형(柳根灐)이 5년에 걸쳐 옥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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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포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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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명낙가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부터 백일축수도량을 개설하고 있다. |
2.
등명낙가사 오백나한전 밑에는 등명약수(燈明藥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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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등명낙가사의 주변 명소로 동해의 일출과 월출(月出), 경치가 좋은 해안선, 철길
따라 전개 되는 소나무 숲길, 등명 해수욕장 등도 놓치기 아까운 볼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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