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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10 19:49
[출판/공연] 대학차록 독해 <대학에서 치국의 도를 깨닫다>출간
 글쓴이 : 양경연기자
 

석탄 이신의의 『대학차록』은 조선의 지도자 철학서였다


석탄은 「대학장구」의 체제인 장章과 구句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주자학 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조선 성리학을 정치精緻한 분석적 학문방법론의 차원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 그 만큼 「대학차록」의 편제나 학문적 특징을 고려할 때,「대학차록」 에 스며있는 석탄의 사유(思惟)는 조선 성리학의 역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철저하게 주자의 「대학장구」에 터하여 그 본질을 캐묻고 원의(原義)에 맞게 해설하려는 석탄의 학문 태도는 고고한 선비이자, 원칙에 충실한 정치 철학자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몸소 실천 한 학자 관료이자 조선의 지식인상을 드날린, 조선지성사의 자랑이다.

   

원저자 이신의(李愼儀, 1551~162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세에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하에 취학, 20여 년간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스승의 권유로 관직에 나갔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이내 사직하고 학문에만 심취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300여 명을 모아 의병장으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한강, 행주산성 주변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니, 조정에서 직산현감에 제수하였다. 이후 괴산, 임천군수, 홍주, 해주, 광주목사 등 16여 년을 목민관으로 지냈다. 광해군의 난정에 정사헌의丁巳獻議 항론을 올려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고 6년여의 위리안치 고초를 겪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의로 조정에 복귀 경연특진관, 형조참판으로 승차하였으나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대왕의 호종길에 나섰다가 수원에서 별세하였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내렸으며 고양 문봉서원, 괴산 화암서원, 광주 유애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탄집石灘集」이 있고, 「대학차록大學箚錄」, 「가례차록家禮箚錄」과 대표적 작품으로 「사우가四友歌」와 「단가육장短歌六章」등이 있다.

 

 번역·해설 신창호(申昌鎬)

고려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철학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고려대학교에서 동양교육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 입학사정관실장과 교양교육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철학연구회 부회장, 한국교육철학회 부회장, 한국교육사학회 편집위원장 등 각종 학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한국학 전문가 양성기관인 한국고전교육원에서 「소학」, 「대학」, 「중용」, 「주역」등을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다양한 인문학 특강과 저술 작업을 통해 동서양 고전의 현대화와 대중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글논어」, 「관자」, 「유교의 교육학 체계」, 「대학, 유교의 지도자 철학」 등 30여 편이 있다.

 

 원저자 석탄 이신의 |번역.해설 신창호 |값 21,000원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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