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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06 01:45
[출판/공연] 한국인의 필독서 <난중일기>
 글쓴이 : 곽선영기자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이 책은 노산이 1960년대 역주해한 『난중일기』(1968, 현암사)를 새롭게 다시 펴낸 것이다. 노산은 이순신 장군의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있는 내용을 보충해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앞서 1960년 당대 최고의 한학자들과 함께 작업한 『국역주해 이충무공전서』(충무공기념사업회 간행)가 기초가 되었다.
노산 역주해본은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격이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모든 『난중일기』 국역본은 이 책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대학 시절 읽었던 『난중일기』도 바로 노산 역주해본이었다.
1960년대 번역이라 문장과 표현이 지금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맞춤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두었다. 다만 관련 자료를 참조해 명백한 오류 또는 오기는 수정했다. 또한 현재 지명 설명은 현재 행정구역상 이름을 반영하는 등 현재 독자들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 없도록 다듬었다.


 『난중일기』는 일기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상황과 진중 생활을 꼼꼼히 기록하는 한편 국정, 가족, 동료 등에 대한 내밀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일기마다 간결한 문체에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순신 저자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사화로 몰락한 문반 가문의 사형제 중 셋째였다. 이름 순신은 중국 삼황오제의 순(舜) 임금에서 따왔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고 21세 때 혼인한 이후 병학과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세 때 처음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32세 때 식년 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무관으로서 승진과 좌천,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며 동구비보(현재 함경도 삼수)의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만호, 함남 병사 군관, 건원보(현재 함북 경원)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현재 함북 경흥)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선전관에서 정읍 현감으로 그리고 1591년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1593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조정을 기망하고 왕명을 어겼다고 해서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고 투옥, 고초를 겪었다. 정유왜란의 와중에 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같은 해 7월(양력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궤멸 상태에 이르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선조 37년(1604) 1등 선무공신에 책봉되었고, 인조 21년(1643)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2년 뒤 『난중일기』를 포함해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되었다.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값15,920원 |지식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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