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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30 21:11
[출판/공연] <올재 셀렉션즈 병법서 세트 >출간
 글쓴이 : 전영숙기자
 

동서양 전쟁사로 병법을 분석한 새로운 번역,

《손자병법》《오자병법》


동양의 군사학 고전 중 가장 중요한 7권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병가(兵家)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새 번역으로 나왔다. 전쟁사 연구자인 임용한 박사가 풍부한 동서양 전쟁사 사료를 곁들이며 병법을 풀어 냈다. 두 책은 예로부터 ‘손오병서(孫吳兵書)’라 불리며 필독서로 평가받았으며, 손자와 오자를 모두 관통해야 비로소 병법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특히 《오자병법》은 위무후와 오자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에 직접 참여하듯 번역한 점이 특징이다


저자:  손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전략가. 보통 손무 또는 손무의 후예 손빈에 대한 경칭으로 손무는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자는 장경이다. 그는 일찍이 '병법' 13편을 오왕 합려에게 보이고 그의 장군이 되었으며,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무찔렀다. 군대를 중시했으며 '적과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즉 적과 나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의 많고 적음, 강약, 허실, 공수, 진퇴 등의 형세를 잘 분석하여 적을 제압하면 승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전략 전술을 활발하게 운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 '손자 병법'은 중국 최초의 병서이다. 1972년 산둥성 린이현 인췌산에 있는 한묘에서 죽간 '손자 병법' 13편이 출토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통행되던 송본과 같다. 손빈은 전국 시대의 병법가이며 일찍이 방연과 병법을 공부했다. 방연은 위 나라 혜왕의 장군이 되었는데, 그는 손빈의 재주를 시기해서 위나라로 그를 불러들여 빈형(슬개골을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이로 인해 손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손빈은 후에 제나라 위왕의 군사가 되었는데, 위왕은 계릉과 마릉에서 위군을 차례로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손빈은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 중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했고, 전쟁 중에 특히 사람의 주관적인 능동 작용을 중시하여 '천지간에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했다. 단지 좋은 무기에만 의지하는 것으로 강대하다고 할 수 는 없으므로, '갑옷의 견고함이 병사를 이롭게 하나,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저서 '손빈 병법'은 당나라 이후에 유실되었는데, 1972년 인췌산 한묘에서 그 죽간이 발굴되었다


저자 : 오기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 사람이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공자의 제자 증삼의 아들 증신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처음에는 노나라 장수로서 제나라와 싸워 대승했으나, 곧 망명하여 위나라 문후왕에게 중용되었다. 진나라와의 접경 지역인 서하의 태수로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무후왕 때 모함을 받아 다시 초나라로 망명했다.


위나라 시절에 저술한 《오자병법》으로 《손자병법》의 손무(孫武)와 함께 최고의 전략가로 칭송받았다. 실전에서 76번을 싸워 무패의 기록을 남겼다. 법가 계열의 정치가로 세습귀족의 특권을 박탈하는 등 갖가지 개혁정치를 펴다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올재 셀렉션즈 병법서 세트|저자 손무,오기|올재클래식스|값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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